▲2013년 8월 7일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기 위해 회의장으로 입장하고 있다. 뒤에 보이는 이는 김기춘 신임 비서실장.
연합뉴스
이 이름들 중 가장 마지막의 3명이 이 사건 당시 사법당국의 수뇌부들이다. 그 중에서 단연 김기춘 현 청와대 비서실장의 이름이 눈에 띈다. 김 비서실장은 김기설씨가 분신한 뒤 18일 뒤인 1991년 5월 26일 노태우 대통령에 의해 법무부장관에 임명됐다.
유서대필 사건 관련자들 중엔 김 비서실장이 가장 '잘 나가는' 사람이었다. 1992년 10월 법무부장관을 그만 둔 김 비서실장은 그해 12월 대선에서 김영삼 민자당 후보의 승리를 위해 '초원복집 회동'을 열기도 했다. 부산시장, 부산지방경찰청장, 안기부 부산지부장, 부산지검장, 부산상공회의소장 등을 불러놓고 '지역감정 조장'과 '공무원 동원' 등 불법 선거운동을 모의한 일이 폭로됐지만 이를 주도한 김기춘 비서실장에겐 아무일이 없었다. 검찰은 김 비서실장만 불구속 기소했지만, 김 비서실장에 적용된 선거법 조항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을 내리면서 공소는 취소됐다.
오히려 김영삼 정권은 김 비서실장에게 한국야구위원회 총재직을 주고 신한국당 국회의원 자리를 줬다. 1996년 자신의 고향이자 김영삼 대통령의 고향인 경남 거제에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된 김 비서실장은 두 차례 더 당선돼 15~17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에서 승리했고 허태열 비서실장의 후임으로 임명된 김기춘 비서실장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라서게 됐다. 역시 공짜로 된 건 아니었다. 원로그룹인 '7인회'의 멤버로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 헌신한 결과였다.
김기춘 비서실장은 법무부장관을 하기 전엔 검찰총장을 지냈다. 그 후임자가 유서대필 사건 당시의 정구영 검찰총장이다. 검찰총장 내정 때부터 검찰의 정치적 중립에 대한 기대는 사라졌다.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20개월 근무한 사람이 검찰총장이 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김기설씨가 분신한 1991년 5월 8일 정구영 검찰총장은 전국 검찰에 이어지는 분신자살에 조직적인 배후가 있는지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1992년 12월 임기 2년을 채우고 퇴임한 정 전 총장은 대우증권, 녹십자, 쌍용자동차, 두산엔진 등의 사외이사를 맡기도 했고, 지난 대선에선 다른 법조인 244명과 함께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를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나섰다. 전재기 당시 서울지방검찰청장은 1992년 대구고검장, 1993년 법무연수원장을 지낸 뒤 변호사로 개업했다.
공소유지 위해 부장과 검사들 묶어서 인사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