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삼관매혈기
푸른숲
위화의 <허삼관매혈기>는 제목 그대로 허삼관이 피를 파는 기록이다. 허삼관은 피를 팔아 일가를 이룬다. 가진 것 없는 사내였던 그는 피를 판 돈으로 아내 허옥란을 맞이하고 일락, 이락, 삼락 삼형제를 얻는다.
그의 삶은 여느 누구 못지 않게 굴곡지다. 가장 아끼던 자식인 일락이는 알고 보니 외간남자의 혼외자식이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락이 방씨네 아들의 머리통을 깨는 바람에 큰 빚을 진다. 극심한 가뭄으로 가족 모두 굶어 죽을 뻔한 위기도 넘긴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아내가 사상범으로 몰려 가족 모두 고통받는다. 허삼관이 49세 되는 해에는 첫째 일락이 간염에 걸려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인생이 벼랑 끝에 내몰릴 때마다 허삼관은 피를 판다. 그리고 가족을 지킨다. 피를 팔아 빚을 갚고, 국수를 사 먹이고, 아내를 구하고, 간염에 걸린 아들의 목숨까지 살린다. 여기서 피는 중의적이다. 생명을 의미하는 동시에 정신을 의미한다. "피는 부모가 물려주신 거라 팔면 안 된다"는 허옥란의 외침에서 볼 수 있듯이 피를 파는 행위는 생명을 파는 동시에 정신을 파는 행위다. 그러나 허삼관은 가족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도 아깝지 않고 남들의 손가락질도 무섭지 않다. 허삼관은 허삼관이기 이전에 아버지니까.
어느덧 황혼기에 접어든 허삼관. 자식들 다 키웠고 아내와 함께 여유로운 노년을 보낼 일만 남았다. 이제 그는 더 이상 피를 팔 필요 없다. 그런데 문득 젊은 시절 피를 판 뒤에 먹곤 했던 돼지간볶음과 황주가 간절히 생각난다. 그는 마지막으로 피를 팔자고 결심한다. 이번에는 가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자신을 위해. 하지만 늙은 허삼관의 피를 받아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게 또 한 세월이 흐른다.
2013년을 변곡점으로 '아버지'에 대한 인식이 변하는 모양새다. <아빠어디가> <슈퍼맨이 돌아왔다> 등의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보이듯 '가부장적 아버지'는 '친구 같은 아빠'에게 자리를 내줬다. 그러나 이 시대의 아버지상이 어떻게 변하건 간에 단 하나 변하지 않는 게 있다.
"사랑 받기보다 사랑하고, 내리는 비를 대신 맞고, 평생 온몸으로 가족을 부양하는" 우리 시대 아버지의 사명 말이다. 바로 아버지의 사명 말이다. 우리 주변에는 '피' 같은 시간과 정열을 팔아 가족을 지키는 수 많은 허삼관들이 있다. 다시 한 번 이 시대의 모든 허삼관들, 힘내시라.
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푸른숲,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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