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화숙 교수는 거의 1만 쪽에 가까운 노조 자료를 여러 차례 읽는 뒤 큰 혼란에 빠졌다고 회고했다. 한국에서 자주적인 노조가 등장하기 시작한 1980년대보다 한참 전인 1960년대에 일부 산업 노동자들이 전투적이고 민주적인 노조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니! - <배 만들기 나라 만들기> 북트레일러 갈무리
후마니타스
1960년대 조공 노조의 성명에서 자주 되풀이되는 주제는 '소속된 모든 노동자의 공평하고 평등한 대우'였다. 산업화란 미명 아래 희생이 당연시되던 시대란 점을 감안하면, 쉽게 수긍이 가지 않는다. 더군다나 지금과 비교해 굉장히 권위주의적이고 경직된 사회였을 텐데 말이다.
노조는 많은 문서에서 노조가 두 가지 사명을 수행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회사와 산업이 번창하도록 돕는 것과 조합원을 위해 좀 더 복지를 확보하는 것. 이런 목표는 회사 관리자들이 경제 발전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공유한 평등한 파트너로서 노동자를 존중한다면 쉽게 달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측은 규제로만 노동자들을 얽매려 했다. 예컨대 3분 지각에 출근을 못 하도록 막았고, 무보수 휴게 시간도 간섭하고 청소를 시키려고도 했다.
조공 노조의 간부들은 민주적 원칙에 따라 노조를 운영하는 것이 위험을 내재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이 스스로 권위를 위태롭게 하면서까지 민주적으로 행동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저자는 이런 해석을 내놨다.
"그런 자세를 통해서 신분의 평등과 부의 공평한 분배에 대한 그들의 민주적 열망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분의 평등과 부의 공평한 분배는 한국 사회에서 그들이 제대로 인간 대접을 받을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조건이었다." - <배 만들기 나라 만들기> 226쪽또한 노조는 공정성과 연대성을 강조했다. 당시 조공은 고용이 보장되고 좋은 임금과 여러 혜택을 누리는 본공과 회사의 수주가 부족할 때 제일 먼저 해고되는 임시공으로 분할돼 있었다. 임시공은 경영 합리화 방책의 일환으로 도입됐지만, 노동자들의 단결을 약화하기 위해서도 좋은 틀이었다.
조공의 문서를 보면, 60년대 기업의 비용절감 노력이 진행되면서 임시공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63년 본공의 16%에 불과하던 임시공 비율이 67년도에는 본공의 수를 뛰어넘어 153%에 이른다.
그런 상황에서 노조는 임시공을 자신들의 품 안으로 받아들였다. "법은 만민에게 평등한 것으로 법을 위반한 협정은 있을 수 없고 이러한 협정은 당연히 무효가 된다"는 노동청의 해석을 이끌어 낸 노조는 임시공의 가입 자격을 제한하는 단협 조항의 변경을 요구했다. 소속감과 유대감이 절실히 필요했던 임시공들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었다.
결국, 평등한 공동체를 통해 이상적인 민주 사회가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준 이는 노동자들이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이었음을 감안하면 더욱 놀랍다. 사실 당시로는 상당히 미래지향적인 주장이었다. 탐욕에 젖은 정치인과 기업가들이 헤아릴 수 없는 사회적 비용을 유발하고 나서야 깨달은 사실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조공 노조는 경제 발전과 노동자 복지라는 두 가지 목표가 양립할 수 있거나 심지어 상호 보완적인 것이라고 간주했다. 노조원들은 노동자의 복지를 희생물로 삼아 탐욕스런 이윤 추구를 허용하는 방종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제3의 길로서 인간적인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있으며, 그것이 사회를 위해 바람직하다고 믿었던 것 같다." - <배 만들기 나라 만들기> 286쪽그러나 이들의 노력도 결국 국가의 개입에 무너지고 말았다. 회사는 노조의 힘이 점점 커지자 공권력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노조가 경제발전이라는 국가적 사명에 대한 심각한 장애물이나 위협으로 묘사하고, 정부가 그렇게 믿도록 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결국, 1972년 10월, 박정희는 주요 도시에 탱크와 군대를 진입시키고 국회를 해산시켰다. 그와 함께 노동자들의 장밋빛 전망도 와장창 박살이 나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