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 전 재성사. 방철구 사장과 두 아들 뒤로 LP판이 진열돼 있는 모습이 아날로그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장선애
당시 광고판거리(청우체육사 맞은편) 목공소 옆 작은 공간을 빌려서 시작해, 3년 만에 현재 삼산약국 자리에 있던 완구점 옆으로 이사를 했고, 다시 2년 만에 현재 건물을 매입해 정착했다. 개업 5년 만인 1980년에 자기 소유의 건물을 갖게 됐으니, 개인적으로도 성공이려니와 당시 예산지역 문화산업이 얼마나 성했는지 짐작되는 대목이다.
"옛날에는 더 낭만이 있었어요. 중고등학교 음악시간에 이태리, 독일 가곡 몇개는 배웠고, 클래식 음악들도 익혔으니…. 고등학생이 되면 겉멋으로라도 기타를 갖고 싶어 하고 그러다보면 한 두 곡쯤은 코드를 잡을 줄도 알았죠."재성사가 처음 문을 열었을 때 기타 한 대 값이 3500원이었다고 한다. 당시 쌀 한가마에 5000원이었으니 결코 싼 게 아닌데도, 어떻게든 기타 한 대 갖는 것이 청소년들의 로망이었다. 오프라인 음반시장이 살아있던 1990년대까지는 말 그대로 '재성사 전성기'였다.
"예산군에서 들고 다니던 '워크맨'은 모두 우리집에서 샀다고 봐야 해요. 물론 다른 데서 산사람도 있겠지만, 그 정도로 많이 팔았다는 얘기예요. 처음 나왔을 때 30만~40만 원하던 게 나중에 경쟁이 되면서 10만 원대까지 떨어졌었지, 아마."대를 이어 찾아오는 손님들강산이 세 번 변하고 네 번째 변화하는 시점에 이르는 세월 동안, 그 많던 후발 주자들이 부침을 거듭하다 끝내 문을 닫고 말았다. 하지만 재성사만이 예산 사람들의 살아있는 추억으로 존재하는 비결은 뭘까.
"장사는 앉아서 하면 안 돼요. 나는 발로 뛰어서 도매상을 발굴하고, 더 싼 가격으로 공급받아 마진을 최소화했기 때문에 가격 경쟁에서 이길 수 있었어요. 물론 음반시장이 달라지면서는 '마실꾼들 사랑방이다' 생각하고 지내요. 내 건물이니 망정이지 세 내야 했으면 나도 벌써 접었겠죠." 재성사의 주 고객은 벽면 한쪽을 꽉 채우고 있는 카세트테이프를 사러 오는 이들이다. 주인은, 디지털보다 아날로그 기계가 익숙한 동세대의 손님들을 위해 트로트 중심의 가요테이프들을 지금도 계속 들여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