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양화대교 북단에 있는 정몽주 동상.
김종성
우리는 정몽주를 충신으로 떠받든 주역이 조선왕조였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정몽주는 조선을 거부한 인물이다. 정몽주에게 거부당한 조선왕조가 그를 충신으로 떠받든 이유는 무엇일까?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조선왕조에서 정몽주 숭배의 공식적인 계기를 만든 인물은 태조 이성계의 아들이자 제3대 주상인 이방원이다. 그는 개경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처참하게 죽인 장본인이다. 그런 인물이 왜 정몽주 숭배의 단서를 제공했을까? 뭔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이방원은 정도전을 죽이고 정권을 잡은 뒤 정몽주 띄우기를 시작했다. 앞서, 이방원은 정도전을 죽인 뒤 정도전을 철저히 파괴했다. 정몽주에 비하면 정도전은 조선왕조에 훨씬 더 공로가 많은 사람이다. 그런데도 이방원은 정몽주는 띄우면서도 정도전은 철저히 밟아버렸다.
이것은 이방원이 정몽주에게는 악감정이 없는 데 반해, 정도전에게는 악감정이 많았음을 의미한다. 정몽주보다 정도전에 대해 콤플렉스가 많았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별다른 능력 발휘 없이 죽은 정몽주에 비해, 정도전은 왕조 창업 과정과 요동정벌 준비과정에서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죽었다.
정도전이 남긴 유산은 정도전이 죽은 뒤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방원은 정도전의 유령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왕이 되어야 했다. 그러니 정도전에게 콤플렉스를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정몽주는 정도전의 선배 겸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다. 결과적으로, 선배 겸 친구보다는 라이벌로 끝났다. 정몽주는 고려 멸망 직전에 정도전을 죽이려다 실패했다. 그런 정몽주를 띄우는 것은 객관적으로 볼 때 정도전을 욕보이는 행위였다. '조선을 거부한 정몽주'를 통해 '조선을 만든 정도전'을 욕보이는 행위는 정도전에 대한 이방원의 감정이 그만큼 편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권근이 이방원에 '정몽주 띄우기'를 제안한 이유이방원이 정몽주를 띄운 데는 보다 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이방원이 집권할 당시만 해도 사회적으로 하극상의 풍조가 만연해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전에 이성계는 우왕·창왕·공양왕을 연달아 갈아치우고 왕이 됐다. 또 이방원 자신도 정도전과 이성계를 몰아내고 왕이 됐다.
이방원은 이런 하극상 풍조에 종지부를 찍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자면 충신의 대명사를 찾아내서 사회적으로 띄울 필요가 있었다. 처음에는 이성계의 열렬한 동지였지만 막판에 '고려왕조 사수'를 외치다 죽은 정몽주는 고려왕조 입장에서는 충신이었다. 그런 정몽주를 띄우는 것은 충효 논리를 확산시키는 데 유리했다. 조선왕조의 적인 정몽주를 띄우는 것은 이방원의 광폭 정치를 과시하는 데도 유리했다.
태종 1년 1월 14일자(양력 1401년 1월 28일자) <태종실록>에 따르면, 이방원의 측근인 권근은 이방원에게 정몽주 띄우기를 제안했다. '이전 왕조의 충신을 띄우는 방법으로 지금 왕조에 대한 충성심을 확산시킬 수 있다'는 게 권근의 논리였다. 다분히 정치적 의도로 정몽주 띄우기를 제안했던 것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조선왕조의 정몽주 숭배가 시작됐던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는 조선시대의 정치적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롭다. 따라서 우리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정치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우리 시대의 객관적 관점으로 정몽주의 충심을 판단하는 게 가능하다. 객관적 판단이란 것은, 정몽주가 남긴 단심가뿐만 아니라 그의 행적까지도 함께 고려하여 그의 충심을 냉정히 판단하는 것이다.
정몽주는 1388년에 벌어진 이성계의 쿠데타(위화도 회군)를 지지했다. 이성계는 '지금 단계에서는 요동(만주) 정벌이 불가능하다'는 논리를 내세워 임금인 우왕과 실권자인 최영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성계의 논리가 맞는지 여부를 떠나서, 이성계의 행위는 고려왕조의 시각에서 보면 엄연한 반역이었다. 만약 성공한 반역이 되지 않았다면, 이성계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엄연히 반역인 위화도 회군을 지지한 정몽주의 행위는 과연 충신의 행위였을까?
고려 충신으로 알려진 정몽주, 그러나...맹자는 폭군 방벌 사상을 역설했다. <맹자> 진심 편에 따르면 "군주가 어질지 못할 경우에는 쫓아낼 수 있습니까?"라고 공손추가 질문하자, 맹자는 "이윤이 가진 뜻이 있으면 옳은 일이지만, 이윤의 뜻이 없으면 찬탈이다"라고 대답했다. 이윤은 은나라의 재상으로서 불의한 왕인 태갑을 탄핵했다가 태갑이 죄를 뉘우치자 복권시킨 인물이다. 이윤처럼 공정한 정신으로 폭군을 몰아내면 혁명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불법 찬탈이라는 게 맹자의 사상이다.
맹자의 영향을 받은 유교 선비들은 '천명을 위반한 폭군을 쫓아내는 것은 충효 논리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정몽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요동을 정벌하라"는 우왕의 명령은, 실현 가능성의 여하를 떠나 천명을 위배한 것이라고 볼 근거가 별로 없었다. 따라서 정몽주가 진정한 충신이었다면, 왕명을 어기고 쿠데타를 단행한 이성계를 단죄했어야 했다. 하지만 정몽주는 쿠데타를 지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