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가 맛있으면 됐지? 이건 아니죠

['고기 킬러' 채식 전도사 되다 ⑥] 동물은 '기계'가 아닙니다

등록 2014.03.13 11:02수정 2014.03.13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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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은 자동장치, 즉 기계다. 동물에게는 영혼이 없기 때문에 즐거움·고통뿐 아니라 그 무엇도 느끼지 못한다. 물론 동물을 칼로 찌르면 비명을 지르고 몸부림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고통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시계가 째깍거리는 소리나 다름없다. 시계가 째깍거리는 이유는 기계장치의 원리에 따른 것이지 고통 때문이 아니다. 동물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시계와 동일한 원리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물론 동물은 시계보다 복잡하다. 시계는 인간이 만든 기계이지만, 동물은 신이 만든 훨씬 복잡한 기계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오늘날 위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을 듯하다. 그런데 "동물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면서 위와 같은 주장을 펼친 17세기의 철학자가 있다. 그 철학자는 바로 르네 데카르트.

'현대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데카르트가 이런 주장을 했다니 믿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동물기계론'은 동물권 관련 서적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다. 이런 이론이 등장하게 된 시대적 배경에는 실험 과학의 확립과 함께 폭발적으로 증가한 생체해부실험이 있다.

그 시대에는 지식인층, 과학자를 대상으로 공개 생체해부실험이 빈번하게 열렸다고 한다. 예를 들어 개의 다리에 못을 박아 탁자에 고정시킨 다음 배를 갈라 혈액의 순환을 관찰하는 실험이 행해졌다. 그런데 당시에는 마취제가 없었다. 고통스러워하는 동물을 보며 실험자가 느꼈을 심리적 부담과 실험의 잔인성에 대한 비판을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 이때, '동물이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주장은 훌륭한 해결책이 됐다고 한다.

결국은 '남의 살'

부리 자르기(debeaking) 부리 자르기는 닭들이 과밀사육 스트레스로 서로 쪼아대는 걸 방지하려고 부리 끝을 자르는 관행이다. 이것은 극심하고 만성적인 고통을 야기한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과밀한 사육환경의 개선이지만, 그것은 이윤의 감소로 이어진다. 그 결과 닭의 고통을 무시하는 관행이 채택된다. 다큐 <지구생명체>의 한 장면. ⓒ Nation Earth


동물이 고통을 느낀다는 건 오늘날 '상식'으로 통한다. 하지만 그에 대한 태도는 데카르트가 살았던 시대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나는 그 사실을 2010년의 어느 토요일 오후 다큐 <지구생명체>를 통해 확인했다.


동물의 고통은 더 이상 의심이 대상이 아님에도 여전히 무시되고 있었다. 동물로 이윤을 창출하는 현대의 산업은 말 그대로 '동물학대 산업'이었다(관련기사 : 산 채로 목 자르고...그걸 맛있게 먹다니!).

나를 무엇보다 불편하게 했던 것은 영상 속 학대가 동물을 증오하는 몇몇 사람의 만행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을 포함한 보통 사람들이 저지르는 학대였다. 내 손으로 해치지 않았을 뿐, 나는 동물의 살과 털가죽을 소비함으로써 그들의 고통을 늘리고 있었다. 그런 제품에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함으로써 학대를 후원하고 있었다.

공장식 축산의 현실은 더없이 비정했다. 종 고유의 본능은 물론 기본적인 자유마저 부정하는 사육환경에서 동물의 '삶'은 존재할 수 없었다. 농장은 고기·달걀·우유를 찍어내는 '공장'이었고, 동물은 고기·달걀·우유 '기계'였다. 이윤과 효율성이 우선시되는 공장식 축산에 동물의 고통에 대한 배려는 없었다.

미국의 기계식 도살장 영상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목이 반쯤 잘린 채로 피 웅덩이에서 몸부림치며 울부짖는 소. 그 현장의 참혹함은 고기라면 환장했던 내가 그 날 하루만이라도 고기에 대한 입맛을 완전히 잃어버리기에 충분했다. 그 충격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결국 '남의 살'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 누구도 비판할 수 없었다. 고기를 싼값에 많이 먹고자 했던 나의 욕망이 그런 현실을 지지해왔기 때문이다. 남의 살을 귀한 줄 모르고, 아낌없이 먹으려면 당연히 그만한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생매장 돼지들의 절규 3년 전 구제역 사태로 생매장된 돼지들을 동물사랑실천협회가 촬영한 영상의 한 장면. ⓒ 동물사랑실천협회


몇 년 전 직장 회식이 떠오른다. 1차는 삼겹살집, 2차는 노래방, 3차는 또 다른 삼겹살집에서 이뤄졌다. 이미 배가 불렀지만 일행이 또다시 삼겹살집에 간 이유는 그저 장소를 옮기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고기를 시켜 구워놓기만 한 채 전부 남기고 왔다.

먹지 않고 버려진 고기 역시 고통의 산물이다. 우리는 생존만을 위해 고기를 소비하지 않는다. 내 돈으로 소비하지 않으면 더더욱 아까운 줄 모른다. 

"무슨 상관이야? 맛있으면 그만이지…."

이런 문제를 제기할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반응들이다. 생명이 한낱 소비재로 추락해버린 비참한 현실에도 그저 코웃음 치는 사람들. 고통에 대한 공감을 '감상주의'라며 비웃는 사람들. '생명존중'을 씹다 버린 껌처럼 그저 흔하고 무의미한 말로 여기는 사람들. 인간의 비극도 조롱당하는 오늘날, 동물에 대한 이런 반응은 놀라운 일도 아니다.

이렇게 반응하는 이유는 인간으로서 무언가 느끼고 생각하기를 포기했기 때문이 아닐까? '먹는 것'에 대해서는 무조건 생각을 멈추고, 어떤 관점도 갖지 말아야 하며, 본능에만 충실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우리가 다른 동물의 고통에 그토록 무감각한 존재였던가?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을 잃어버릴 때 인간다움은 사라진다. 

"변화를 원한다면 당신이 먼저 그 변화가 되라" 

먹기 위한 사육을 멈출 수 없다면 보다 덜 잔인한 사육방식을 도입해야 한다. 시민단체들이 주기적으로 창궐하는 AI를 비롯한 전염병과 관련하여 2월 28일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공장식축산 폐기와 동물복지축산 전면도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조세형


심하게 구타당한 뒤 건물 10층에서 내던져진 고양이 '은비' 사건. 고양이를 잔인무도하게 학대한 사진을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캣소우' 사건. 머리 중앙에 대못이 박힌 길고양이 사건. 나는 도를 넘은 동물학대에 치를 떨었고, 이에 제대로 된 처벌조차 이뤄지지 않는 한국의 현실을 개탄했다.

그러나 나는 정작 나 자신이 동물경시를 양산하는 시스템의 후원자라는 사실은 인식하지 못했다. 각종 매체를 통해 진실을 대면할 기회조차 거부했다. 혐오스러운 걸, 마음 아픈 걸 굳이 알 필요가 있냐고 생각했다. 진실 앞에서 나는 단지 마음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피해자를 자처했다. 그렇게 진짜 피해자와 진짜 고통을 외면했다. 

매순간, 쉼 없이 계속되는 학대에 눈감은 채 동물의 처우를 개선할 수 있을까. 동물을 물건 취급하는 학대의 뿌리를 지지하면서 개·고양이 복지를 말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것은 인간이 '반려동물'이라고 부르는 일부 동물만을 위한 불평일 뿐이다. 이런 투정은 세상에 모기소리만한 영향도 미칠 수 없다.

간디는 "변화를 원한다면 당신이 먼저 그 변화가 되라"고 말했다. 현실을 바꾸려면 스스로 실천하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 개인의 인식변화와 실천이 모여 사회적 공감대를 이루지 않고 법제도의 변화가 가능할까? 사회적 요청도 없는데 어느 마음씨 좋은 국회의원이 인간도 아닌 동물을 위한 법을 만들어줄까? 

공장식축산 폐기와 동물복지축산 전면도입을 촉구하는 동물사랑실천협회 회원들. ⓒ 조세형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사람으로서 농장동물의 희생에 대한 변명이 궁색했던 나는 "식물도 생명이고 고통을 느낄지 모른다"며 고기를 먹는 습관을 합리화했다. "살면서 동물에게 전혀 해를 끼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며 일상의 메뉴 선택만으로도 줄일 수 있는 고통까지 외면했다. 나는 추상적인 생각에 기대어 실제로 존재하는 고통을 모른 척했다.

전 세계에 굶어 죽는 사람이 허다하니 내 곁의 배고픈 이웃을 돕는 것도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 나는 왜 농장 동물의 고통은 그토록 외면하려고만 했을까? 이제 솔직해져야 했다. 나는 실천하기 싫었던 것이다. 동물은 불쌍하지만 굳이 불편을 감수하기는 싫었던 것이다. 입맛을 포기하기 싫었던 것이다.

이제 변명은 그만둬야 했다. 적어도 '나'로 인한 동물의 고통은 내가 막을 수 있었다. 물론 살면서 동물의 희생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완벽할 수 없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건 핑계일 뿐이다. 

"나는 모든 것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무언가는 확실하게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없는 것 때문에 할 수 있는 것까지 포기하지는 않겠다."(에드워드 에버렛 헤일) 

내게 채식주의는 더 이상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었다. 그것은 따로 시간과 비용을 들이지 않고 동물의 고통을 줄이는 일상의 실천이었다. 하루 세 번 동물을 구하는 소중한 기회였다. 나는 내게 주어진 소중한 기회를 거부하지 않기로 했다.

그토록 불을 밝히기를 거부했던 머릿속의 전구 하나가 비로소 환하게 켜진 것 같았다.

(* 다음 글에 계속됩니다.)
#지구생명체 #농장동물 #채식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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