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룽장성의 광야로 지평선이 끝없이 펼쳐졌다.
박도
광야를 보다사실 나는 '지평선'이니 '광야'니 하는 말은 들어봤어도 실제 보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김제평야가 가장 넓다고 하였지만 직접 가보니 멀리 산이 보였다. 그래서 지평선이나 광야를 상상만 하다가 늘그막에야 그 지평선과 광야를 여러 차례 볼 수 있었다.
첫 항일유적답사인 1999년 여름, 그동안 말로만 들었던 넓으나 넓은 만주 땅을 내 발로 밟았다. '만주(滿洲)'라는 말은 중국 동북지방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의 동삼성을 일본인들이 붙인 지명이다. 만주는 그 면적이 자그마치 123만 평방미터로 우리나라 남북한 전국토의 다섯 배가 훨씬 넘는다. 지난 한 세기 동안 만주 벌판은 군벌과 마적, 일제 관동군과 위만군, 그리고 우리 독립군들이 서로 뒤엉켜 각축을 벌였던 풍운의 대륙이었다.
그때 우리 항일유적지 답사단은 지린성 성도 창춘에 근거지를 마련해 두고, 사방의 항일유적지를 답사하는데, 첫날은 하얼빈 행이었다. 승용차가 창춘 시가지를 벗어나자 말로만 들었던 망망대해 같은 만주 벌판이 끝없이 펼쳐졌다.
창춘에서 하얼빈까지는 280여 킬로미터나 되는 먼 길이었다. 도로는 대부분 일직선이었다. 드넓은 만주 벌판은 온통 옥수수 밭으로 초록의 물결을 이루었는데, 이따금 벼논들도 눈에 띄었다. 그 초록의 향연 틈새에 해바라기 밭들이 무료함을 달래듯 띄엄띄엄 샛노랗게 초록의 들판을 수놓았다. 그야말로 비단에 꽃수를 놓은 듯, 초록의 들판이 그지없이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