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투사 6명 배출한 작은 섬... 자존심 내세울 만하네

[한국의 섬 31] 옛 고향 모습을 간직한 노인들만 사는 대모도

등록 2014.03.15 16:33수정 2014.03.15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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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모서리 선착장  선착장에는 문어단지가 보인다.

모서리 선착장 선착장에는 문어단지가 보인다. ⓒ 이재언


완도항에서 오후 2시에 여서도로 향하는 섬사랑7호를 올라탔다. 이 배는 완도항을 출발하여 맨 먼저 소모도를 대고 다음은 대모도의 모서리와 모동리 그리고 장도와 청산항을 들른 후 비로소 먼 바다에 떠있는 여서도로 향하여 달려간다.


대모도는 섬의 중앙부에 기복이 비교적 큰 산지(최고 높이 241m)가 남북으로 배치되어 있고, 1620년대 마씨, 방씨가 최초로 입도 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한다. 지명의 유래를 대모도는 섬에 띠(茅草)가 많다고 하여 띄섬(모도)이라 하며 소모도 보다 커서 대모도라 일컬어졌다. 면적 5.83㎢, 해안선 길이 21.7㎞의 대모도(大茅島)는 완도에서 직선거리로 13.3km이다.

대모도는 주민이 거주하는 마을은 모두 2곳으로 서편마을을 '모서리' 동편마을을 '모동리'라고 한다.

a 모서리 해변  독립운동을 상징하는 북소리 모형

모서리 해변 독립운동을 상징하는 북소리 모형 ⓒ 이재언


선상에서 바라본 모서리는 해안가에서부터 높은 지점까지 집들이 있었다. 그만큼 고지대 마을이란 의미다. 선착장 방파제는 그렇게 큰 편은 아니다. 모서리 마을은 입도조들이 처음 섬에 들어왔을 때에는 현제 작은 마을 상층에 터를 잡고 거주하였으며 마을 이름을 토성리라 하였다. 그러다가 인구가 증가하여 해안가까지 큰 마을이 형성되어 마을 이름을 작성리라 하였으며, 섬의 서쪽에 위치하여 모서리로 통합하였다.

마침 물이 빠진 시간에 모서리 해안은 다른 해안과 특이하게도 샤워장이 필요 없을 정도의 깨끗한 민물이 바위에서 쉴 새 없이 나오고 있었다. 여름에는 샤워장도 필요 없고 마실 물도 그냥 받아서 먹으면 될 정도였다. 소안도를 지척에 두고 있는 모서리의 포구 자체가 모동리보다 크고 마을도 큰 편이다.

모서리의 특징은 김과 미역 다시마 양식 조건이 양호하여 수산업이 주 소득원이 되고 있다. 이 마을은 김 양식 어장 조건이 양호해 완도군 내에서 가장 좋은 마을로 이름이 나있다. 김 양식 기술의 발달로 내만의 지주식에서 외해의 부류식으로 전환되면서 바다의 깊이와 조류 등이 적당하여 마을 앞에 거대한 바다 장소를 인근에 있는 노화도와 소안도 사람들에게 양식장올 임대해주어 짭짤한 수입을 올리고 있다. 같은 대모도이지만 모동리와는 완전히 생활 양상이 다른 곳이었다.


a 모서리 마을 입구 항일운동 내력이 쓰여있다.

모서리 마을 입구 항일운동 내력이 쓰여있다. ⓒ 이재언


선착장 앞으로 마을회관과 정자가 세워져 있다. 마을 표지석 '띠섬 모도 서리' 옆에 마을 연혁과 더불어 모도항일운동기념비 안내문이 세워져 있고 그 옆은 다도해해상국립공원 표시판도 있다. 이 뒤로 약간 높은 둔덕이 있는데 이곳에 비가 세워져 있다. 무성한 잡초 사이를 걸어 올라가면 두 기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주변은 억새로 뒤범벅이 되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왼쪽은 항일비 비석이고 오른쪽은 북을 표현한 상징물이다. '독립의 혼이 북소리를 통해 남해 바다를 흔들어 울려 퍼지리라'.

이곳은 바로 앞 소안도와 더불어 항일운동이 일어났던 곳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정두실 외 14명이 배달청년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당시 대모도에는 마을의 개량서당 지원과 항일투쟁이 목적으로 일본의 침략강탈에 저항하는 '모도청년회'가 조직되었다. 1920년 초 천병섭, 장석칠, 정두실, 최찬규, 서재만 등이 마을청년 14명과 함께 조직되어 본격적인 항일투쟁에 돌입했다.


이들은 각 마을을 다니면서 주민들에게 항일무력시위를 권유했다. 이들은 1925년 1월 월례회의에서는 일본인을 비롯한 친일세력과 단절할 것을 결의하였고, 4월 회의에서는 일본인들을 응징하고 경찰서 등 관공서를 파괴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 뒤 청년회의 비밀활동이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회원들과 함께 붙잡혀 곤욕을 치렀다.

천홍태 애국지사는 1926년 10월 4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징역 10월을 선고받았다. 목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혹독한 고문 후유증으로 1927년 6월 18일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완도 지역에서 독립운동은 했던 섬은 소안도와 신지도 등이다. 섬이 비교적 크고 교류와 조직과 협동심을 발휘할 수 있겠지만 이렇게 불편한 조금만 섬에서 여섯 분의 독립투사를 배출했다니 대단한 사건임이 틀림없다. 섬사람들의 자존심을 내세워주는 일임이 틀림없다.

a 폐교 직전의 모도분교  모도분교 학생들 모습

폐교 직전의 모도분교 모도분교 학생들 모습 ⓒ 이재언


이곳은 모든 행정 기관이 이웃 마을인 모동리에 있고 모서리에는 유일하게 지서가 있다. 해양경찰이 아닌 드물게도 일반 경찰이다. 3일을 근무하고 난 후 하루 비번 날에 육지로 간다. 문화공간이라고는 마을 끝자락에 위치한 학교 건물. 두 개의 교사를 가진 청산중앙초등학교 모도분교장은 폐교에 직면한 분교다.

한때 135명이 다녔던 학교 학생이 이렇게 줄었다. 역시 1명의 선생님과 3명(남2, 여1)의 학생만이 모도분교를 지키고 있다. 몇 개의 운동시설이 전부인 운동장은 깨끗한 편이지만 화단 속에 있는 이순신과 이승복 동상은 파란색으로 방치되어 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놓치고 말 조형물로 전락했다. 여기는 이순신 동상 옆에 거북선도 있다. 학교 담벼락 밑에는 우물터가 있다.

a 모동리 마을 입구  모동마을 표지석

모동리 마을 입구 모동마을 표지석 ⓒ 이재언


모서리를 돌아보고 모동리로 왔다. 예전에는 산을 넘어서 갔지만 최근에 자동차도로가 생겨서 편리하다. 방문한 날 이 고개를 넘으려고 계획을 세웠지만 눈이 아직도 녹지 않아서 일주 도로를 걸었다.

지금은 모동리와 모서리 간에 도로가 개설되기 전에는 말 할 수 없이 불편하였다. 면출장소, 보건진료소, 우편취급소, 한전은 모동리에 초등학교, 경찰출장소 등은 모서리에 두고 있어 어쩔 수 없이 두 마을이 서로 왕래를 해야 하는데 모동리와 모서리 왕래가 완도를 왕래하는 것보다 훨씬 불편했다고 하니, 이 문제가 해결되어 대모도의 가장 큰 숙원사업이 해결되었다. 

모동리는 제법 높은 지점까지 집들이 있다. 그만큼 고지대 마을이란 의미다. 선착장 방파제는 그렇게 큰 편은 아니다. 그다지 많지 않은 작은 배들이 열 손가락에 들 정도다. 길은 경사진 시멘트 포장길을 얼마 정도 올라가면 오른쪽으로 우편취급국이 있다. 그 맞은편에 청산면 모도출장소가 있다. 그 뒤로는 보건지소. 단층 건물로 아주 깔끔하게 만들어졌다. 우측에는 내연발전소 건물이 들어서 있지만 바다를 통하여 해저 케이블이 들어온 관계로 폐쇄된 상태였다.

a 모동리 선착장  섬사랑호가 들어오고 있다.

모동리 선착장 섬사랑호가 들어오고 있다. ⓒ 이재언


대모도에 특이할 만한 점은 모동리와 모서리가 동서로 나누어 크게 갈등을 일으킨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1964년 두 마을 간의 경쟁을 통해 면사무소 출장소가 규모가 훨씬 적은 모동리에 세워지게 되었고 이에 따라 다른 공공기관들이 계속 모동리에 세워지게 되자 한동안 마을 간의 갈등이 매우 심했다고 한다.

그 경과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모동리에서는 1960년대 부인회에서 마을 재건 운동을 시작했다. 물론 남자들은 미처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모동리 부인회는 밭농사, 멸치잡이, 해초 채취를 하며 어렵게 사는 마을에 먼저 매끼마다 보리쌀 한 숟갈씩 저축하기로 합의했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66년에는 고양이 12마리를 사다 기르기 시작했고, 마을 공동벽시계를 사고, 경로잔치를 벌이며,  마을엔 '청운독서회'라는 간판이 붙은 도서관에 청소년들을 위해 책을 사서 기증했다.

그 당시 살기도 힘든 시절인데 섬마을에 조그만 도서관이 있다는 게 솔직히 믿겨지지 않았다. 아마도 동네에 교육에 관심이 많은 어른들과 청년들이 힘을 합쳐서 자라나는 학생들을 위해서 도서관을 건립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선견지명이 높은 그런 어른들 덕분에 모서리보다 학식이 뛰어난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모서리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밝아서 그들은 경제적인 부분에 투자를 많이 하였다.

한편 1971년 행정기관에서는 면 출장소를 세우는 데 있어서 모동리보다 인구가 많은 모서리에 택하려 들었다. 이에 모동리 부인회에서는 당시 27만5천 원을 선뜻 내놓으며 훌륭한 청사를 먼저 지어 군청에 기증하자고 제안했고 그제야 남자들도 합세하여 일심으로 건물을 신축해 버렸다.

모동리는 소모도와 함께 면소재지 청산이 바로 앞에 가까이 있기에 모동리에 세워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만약에 소모도 주민들이 모서리 편을 들었으면 출장소와 보건지소 우체국 한전 등이 모서리에 세워졌을 가능성도 있었다.

청사 신축비 문제로 어려움을 겪던 도당국이 모동리 주민들의 청을 쾌히 숭락하고 모동리에 면사무소를 세워버린 것은 말 할 것도 없다. 그러나 청사 문제는 인구가 모동리보다 많은 모서리의 협동심을 자극했고 이때부터 두 마을 간에 대립과 갈등이 치열했다고 한다.

벌써 40년 전의 일이지만 인구도 많고 경제력도 있고, 그런 탓에 교육수준이 있고 항일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발자취가 뚜렷하고 진취적인 해양문화를 지닌 곳이 모서리 마을이다. 섬사람이라고 하수이 대하던 육지 사람들에게 독립 운동을 통하여 섬의 명예를 드높여 준 모서리에 세워 준 것도 좋을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a 모동리  모동 마을 전경

모동리 모동 마을 전경 ⓒ 이재언


이런 사연을 알고 대모도의 모서리와 모동리를 돌아보면 다른 섬보다 더 머물면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싶은 곳이었다. 모동리의 공공 기관들을 지나 마을로 올라 온 후 건너편으로 넘어가면 내리막길이다. 방향은 남서쪽. 언덕에 마을복지회관과 팔각정으로 된 쉼터가 있는데 이곳에서 마을을 바라보면 마을과 바다가 한 눈에 쫘악 들어온다. 팔각정 뒤로 모동리사무소가 있는데 이곳에는 개발위원회가 입주해 있다.

여기서부터 마을은 경사진 골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산을 등지고 남쪽을 향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 이채롭다. 산 아래는 밭이고 마을 아래는 바로 해안이다. 그러나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볼 수 있었다는 '상투 귀틀집' 같은 정겨운 초가지붕은 없어졌다. 그리 복잡하지 않은 조그마한 길. 중간에 길이 있지만 집으로 이어지는 막다른 골목길들이다. 경사진 지형이다 보니 담벼락이 참으로 높다. 거기에다 돌담들이 주를 이룬다. 어른 키보다도 더 높은 담벼락이다.

주변에 공동 우물터가 하나 보인다. 그러나 겨우 경운기 하나 드나들 수 있는 그런 길이다. '대모도길'은 시야가 확 트인 길이다. 오른쪽은 집이지만 왼쪽은 밭이고 더불어 바다가 보이는 길이다. 이 길을 따라 계속 가다보면 집들이 사라지고 대신 밭이 보인다. 길 오른쪽에 집들이 집중 조성되어 있다. 마을 끝, 산길로 이어진다. 그 한쪽 고지대에 위치한 공간이 보인다. 비석이 보이고 경사진 시멘트길이 보인다. 무성한 나무가 몇 그루 보이고 그 사이로 하늘이 보인다.

이 길을 따라 올라가보면 나타나는 공터, 바로 학교 운동장이다. '모동초등학교'로 표시되어 있다. 폐교된 지 오래다. 하얀색의 정문은 두 개의 기둥만이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다. 여기서 바다를 바라보면 바로 청산도가 보인다. 오른쪽 기둥에 학교명이, 양쪽 뒷면에는 '국어사랑', '나라사랑' 구호가 새겨져 있었고, "멸공, 반공, 방첩" 구호가 채 지워지지 않았다. 운동장은 잡초로 무성해 더 이상 사용하지 않은지 참 오래 되었음을 느끼게 한다.

스탠드 위에 있는 하얀색의 학교 건물 역시 색이 바랬다. 1967년에 만들어진 교사다. 복도에는 각종 도구들로 가득하다. 주변은 나무로 교사가 잘 보이지 않는다. 바로 옆 조그마한 건물에는 '모동성교회' 간판이 보인다. 오래 전에 폐쇄된 건물의 임자를 찾지 못하다가 결국 교회는 학교를 매입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대모도를 떠나면서 생각에 잠겼다. 같은 섬이기에 너무 외로워서 형제처럼 사이좋게 지낼 법도 한데 그렇지가 않다. 우리 마을 의식이 너무 강하여 타협과 대화를 단절되고 두 마을이 피나는 경쟁은 많이 별렀다. 그것은 교통이 너무 불편한 독립된 고립 섬마을이다 보니 소규모 섬들은 어느 곳이나 같은 섬으로의 철저한 공동체 의식이 강하다. 반대로 청산도나 큰 섬들은 인접 마을과 교류가 활발하고 개방성 때문에 공동체 의식이 약하다고 보겠다.  

▣ 대모도 개요
대모도는
전라남도 완도군 청산면에 달린 섬으로 면적 5.83㎢, 해안선 길이 21.7㎞, 최고점은 241m 망산이다.

지명유래
띠가 많다고 하여 모도라 불렀다고 전해온다.

☛ 대모도 가는 길
완도항에서 오후 2:30분에 출항하며 여서도를 가는 여객선은 하루 한 차례 섬사랑7호가 소모도, 대모도, 장도 청산도를 경유해 여서도까지 운행하며, 대모도에서 완도항으로 나오는 여객선은 오전 10시에 있다.
#모서리 #모동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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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연구원으로 2019년까지 10년간 활동, 2021년 10월 광운대학교 해양섬정보연구소 소장, 무인항공기 드론으로 섬을 촬영중이며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재정 후원으로 전국의 유인 도서 총 447개를 세 번 순회 ‘한국의 섬’ 시리즈 13권을 집필했음, 네이버 지식백과에 이 내용이 들어있음, 지금은 '북한의 섬' 책 2권을 집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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