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생크탈출 감옥은 처음에는 몸만 가두지만 오래 되면 영혼까지 가둔다는 걸 50년 수감되었던 브룩스는 자살로 보여주었고, 30년 된 레드(모간프리먼)은 희망으로 극복해보였다.
프랭크 다라본트
"하나님, 왜 내게 이런 배역을 주시나요?" "여보세요? 김재식씨? 저, 부탁이 있어서...""뭔데요? 안 그래도 며칠 있으면 피검사도 하고 약 타러 올라갈 텐데 급한가 봐요?""탄원서 한 장 좀 부탁하려고요. 올라오실 때 인감증명서도 첨부해야 하고 해서요."그렇게 국립암센터에서 온 전화는 아내와 나를 상당히 슬프고 불안감에 빠지게 했다. 아내치료를 담당하는 의사 선생님께 12억 원이 넘는 요양급여비 환수 통지서가 왔단다. 잘 해결이 안 되면 아내 치료를 계속 맡아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지금 아내 담당 선생님은 고등학교 은사님이 아내와 같은 난치병이 걸려서 전공을 바꾸며 외국까지 5년씩이나 연구유학을 다녀오셨다. 귀국 후 바로 서울대병원에 복직이 안 되어 1년간 다른 신설 병원에 원장으로 복무하신 게 문제가 되었다. 자격 미달의 설립자가 병원 허가를 받았고 그 1년간 지급된 요양급여비를 원장으로 있었단 이유로 개인이 다시 환불해내라는 벼락. 7년 가까이 지나서, 그것도 12억 원이 넘는 돈을.
연초에 내가 쓴 책을 보내 드렸더니 선생님이 좀처럼 노출하지 않으시는 개인 전화번호로 장문의 문자를 보내오셨다.
"새해부터 아주 큰 선물을 받은 것 같습니다. 어제 처음 책을 손에 잡고는 놓을 수가 없었어요. 사실은 제가 요즘 너무 속상하고 어깨가 무거워 다 내려놓을까 하는 약한 생각을 했었거던요. 근데 제게 큰 용기를 주셨어요. 깊은 곳의 울림은 두말할 필요도 없구요. 제가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ooo 드림."그때는 왜 그렇게까지 선생님이 고마워하는지 이해가 안 되고 당황했었다. 자세한 내용을 몰랐기에, 아내와 나는 추측을 해보아도 알 수가 없었다. '건강하시지, 큰 병원의 교수님이시고, 한 분야의 존경받는 전문가시지, 뭐가 부족한 부분이 없는데, 우리가 힘이 다 된다고 하시지?' 하면서.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내가 보낸 책을 받기 바로 전에 건강보험공단의 요양급여 환수명령서를 받으셨고, 의사 업무를 계속 볼 수 있을지 실의에 차서 고민 중이었는데 우리 책을 단숨에 읽으시면서 다시 용기를 내셨다는 걸.
그날 이후로 혼자 애쓰시며 증인들과 증거를 모아 건강보험공단에 제출하고 취소를 요청했는데 기각되어 부득이 행정소송을 해야만 할 상황이 되셨다. 그래서 병원에서 같이 계시는 전 환우회 간사님이 내게 탄원서를 좀 부탁했다.
'돕다니! 그걸 말이라고? 돕는 차원이 아니라 당연한 일인데, 잘못 되면 평생 치료와 관리를 해야 될 아내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성경의 구절을 써서 법원 판사님께 호소했다.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에서는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또 '잠깐 동안 몇 명은 속일 수 있어도, 오래 동안 많은 사람을 속일 수는 없다!'는 구절도 인용하면서 부디 수백 명의 환자와 천 명도 넘을 그 가족들을 불안하지 않게 해달라, 하루가 급한 난치병 환자들을 사지로 몰아갈지 모를 이 착오와 억울함을 빨리 바로잡아 달라고!
이 상황을 알게 된 어느 분이 이렇게 말하셨다. "주인공 의사 샘 파이팅! 주전선수 대표선수 내외분 파이팅!"이라고, 하지만 하도 답답하고 속상하던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주연이고 주전선수라고요?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아닌 것 같아요. 그냥 약자? 각자 마주 상대하고 있는 벽 앞에서 맥을 못 추는, 하지만 그렇다고 감독이나 영화 전체까지 약하지는 않겠지요? 그거 하나만 믿고 있습니다. 제발 진실은 약하지 않기를."그러다 문득 탄원서를 드리며 '힘내세요!' 말을 드렸던 선생님이 떠올랐다. 왜 신은 우리 의사 선생님께 그런 배역을 주셨을까? 자신의 출세를 양보하면서까지 사시는 분에게, 성공과 명예, 재물을 상으로 주셔도 당연할 텐데 오히려 수모와 오해를 받도록 하시다니, 뭔가 캐스팅의 착오나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이런 식이면 모두가 약아빠지고 몸 챙기는 안전한 일만 하겠다고 살지 않을까? 소신도 양심도 뒷전이고 남 살피는 미련한 짓은 더더구나 멀리 할 것이고, 이 배역은 정말 속상하고 억울하다 싶다.
우울한 기분은 나와 아내의 배역에도 반감이 들게 했다. 몇 년을 남의 도움만 받으며 살게 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불편을 넘어 가시로 찌르는 말도 했다. 힘든 이야기 좀 그만 늘어놓으라고. 그럼에도 달리 선택의 여지도 없고 방도가 없다. 끝없는 치료비도 쏟아넣어야 하고, 아이들도 나도 먹고살기도 해야 하고.
"하나님, 왜 내게 이런 배역을 주시나요? 좀 부자가 되게 해주셔도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지 않는다고요. 나도 아주 나쁜 놈은 아니거든요? 얼마든지 나누면서 살 자신 있다고요! 그러면 폼도 나고 기쁘게 살기도 하고 얼마나 좋으냐구요. 정말…."처음 입원하러 가서 만남부터 치료를 받는 몇 년 동안 선생님께 여러 번 도움과 따뜻한 대접을 받았다. 지난날을 떠올리니 눈시울이 뜨겁고 마음이 미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