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의 정치학> 표지
모티브북
'프랑스·미국·한국 국립묘지의 탄생과 진화'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 <죽은 자의 정치학>은, 죽은 자를 매개로 산 자들의 정치적 열망과 의지가 어떻게 투영되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저자 하상복이 대상으로 삼은 분석 공간은 프랑스의 빵떼옹 국립묘지와 미국의 알링턴 국립묘지, 한국의 국립 서울 현충원이다.
무덤을 통해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나고, 산 자들이 무덤 속의 죽은 자를 놓고 벌이는 정치적 투쟁은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현상이다. 저자에 따르면, 죽은 자와 그를 담고 있는 공간은 정치적 욕망이 표출되는 가장 중요한 자리가 되어 왔다.
저자는 살아 있는 자는 권력의 이해관계 속에서 죽은 자를 정치적으로 이용한다고 말한다. 그 지점에서 사자와 그가 안장되어 있는 곳은 정치적 연극의 소재와 배경이 된다. 국가가 관리하는 국립묘지는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공간이다. 저자는 이들 공간에서 정치와 권력의 성격, 그 근대화의 과정을 본다.
근대국가는 군주라는 정치적 인격체에 토대를 두고 움직이는 전통국가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근대국가에는 국가를 표상하는 인격적 존재가 없고 국민(nation)이라는 추상적인 집단적 인격에 의해 대표된다. 주권을 표상하는 인격적 실체가 없는 국가를 향한 애국의 심리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존재와 가치를 감각적으로 재현해내는 일이 필요하다. 근대의 국립묘지는 그와 같은 정치적 원리의 귀결이다. (21쪽) 저자는 왜 '죽은 자의 정치학', 곧 국립묘지의 정치적 성격을 문제 삼는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립묘지'를 둘러싼 역사적 변천 과정과 그에 얽힌 정치 환경의 변화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국립묘지의 변천사는 다사다난했던 한국 현대사이기도 하다.
군인 묘지였던 국립 묘지, 엄격한 위계질서 공간으로 변형 이 책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국립묘지는 1948년 여순사건과 1950년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창설되었다. 국립묘지는 역사상 유례 없는 이들 두 개의 '반공주의' 사건에서 희생된 군인과 경찰관들을 안장하기 위해 1956년에 만들어졌다. 국립 서울 현충원의 최초 명칭이 '국군묘지'였던 까닭이다.
저자는 그뒤 국립 현충원이 반공군사주의가 응축된 공간으로 자리매김해 오다가, 이승만과 박정희라는 두 권력자가 묻히면서 새로운 정치적 운명을 맞게 되었다고 분석한다. 단지 군인들의 묘소였을 뿐인 국립묘지가 권력을 중심으로 한 엄격한 위계질서의 공간으로 변형된 것이다. 저자는 서울 현충원에서 참배 정치가 일상적으로 연출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본다.
당연하게도, 유명 정치인들이 벌이는 참배 정치는 '정치적'이다. 정치인의 참배 동선은 그들의 정치적 지향점과 목표, 현재의 정치 구도 등 많은 정치적 메시지를 공공연히 드러낸다. 정치인의 참배 정치는 국립 서울 현충원울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념적 긴장과 균열을 잘 보여 준다.
저자에 의하면 국립묘지를 둘러싼 참배와 죽은 자의 정치는 보편적인 정치 현상이다. 이와 관련하여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묘지'의 이중적인 성격이다. 묘지는 대결의 대상이고 갈등의 표상인 동시에 화합의 장치이자 통합의 상징이 될 수 있다. 지금 우리나라는 묘지와 사자를 사이에 놓고 끊임 없이 긴장하고 대립한다. 저자가 한국의 국립묘지를 분석하기 위해 프랑스의 빵떼옹이나 미국의 알링턴 국립묘지를 비교 공간으로 끌어온 배경이 여기에 있다.
서구의 두 나라, 미국과 프랑스는 사자와 국립묘지를 놓고 치열한 이념 갈등을 겪었지만, 궁극적으로 그 속에서 화해와 통합을 실천했다. 프랑스는 19세기 후반 한 위대한 정치가(빅토르 위고)의 장례식을 계기로 국민적 화합의 가능성을 창출해냈으며, 미국은 19세기 말 남부의 대의를 위해 사망한 전몰병사들의 시신을 연방주의의 상징적 공간인 알링턴 국립묘지 안으로 수용함으로써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24쪽)프랑스와 미국이 경험한 일을 우리도 만날 수 있을까. 당분간은 힘들어 보인다. 2009년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안장과,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호실장인 안현태씨를 둘러싸고 벌어진 극심한 갈등과 대립을 떠올려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