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알 6발로 일본열도를 경악케 한 대한의 영웅

[나만의 특종 (17)] <영웅 안중근>의 10·26 의거

등록 2014.03.26 12:05수정 2014.03.26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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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 순국 104주년기념일이다. 나는 이 날을 기념하고자 그분의 생애에서 가장 장쾌했던 1909년 10월 26일 의거와 가장 거룩했던 1910년 3월 26일 순국을 재구성하였다.

나는 의거 100주년 기념일 날인 2009년 10월 26일부터 아흐레간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행장을 그대로 추적한 뒤 순국 100주년 기념일 2010년 3월 26일 <영웅 안중근>을 눈빛출판사에서 펴냈다. 이 기사는 그때의 취재노트를 다시 펼쳐 2회로 축약, 그날의 장쾌한 의거와 거룩한 순국의 모습을 무딘 필치로 그려보았다. - 기자의 말    

1909년 무렵 하얼빈 역 ⓒ 눈빛출판사


1909년 10월 26일, 새벽

그날 안중근은 하얼빈 시 삼림가 김성백씨 집에서 아침을 맞았다. 안중근은 평소와 다름없이 일찍 일어나 세면을 한 뒤 그동안 입고 다니던 새 옷 대신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모자를 썼다. 안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마지막으로 약실검사를 했다. 탄창에는 일곱 발의 탄환이 잘 장착되어 있었다. 안중근은 권총을 쓰다듬은 뒤 다시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안중근은 북녘 하늘을 향해 무릎을 꿇어 성호를 긋고 기도를 드렸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뤼순감옥 수감 중일 때 안중근 의사, 왼손 단지가 선명하다. ⓒ 눈빛출판사



'천주님, 저를 도와 주소서.'


조용히 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 10월 하순이지만 하얼빈은 초겨울로 날씨가 차가웠다. 안중근은 사전에 답사한 대로 하얼빈 역까지 걸었다. 역에 도착하니 시계는 오전 7시 30분을 지나고 있었다. 안중근은 1등 대합실로 갔다. 이토 히로부미를 환영하고자 나온 일본인들이 일장기를 든 채 서성거렸다. 안중근은 아침 요기로 만두와 뜨거운  차를 주문하여 의자에 앉아 마시며 열차도착을 기다렸다.

안중근은 생각할수록 이번 거사는 하늘의 계시만 같았다. 1909년 10월 18일, 엔치아에 머무르고 있던 안중근은 그날따라 갑자기 마음이 울적해지며 초조함을 이길 수 없어 친구들과 작별하고 그날 밤 보로실로프(현 슬라비얀카)에서 기선을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이튿날 그는 블라디보스토크 꼬레아스카야(신한촌) 대동공보사 편집주임 이강으로부터 뜻밖에도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로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안중근은 그 소식을 듣자 겨레의 원수인 그를 처단할 결심을 품었다. 곧 동지 우덕순을 얻고는 이석산에게 거사자금 100원을 강탈한 뒤 열차를 타고 하얼빈으로 왔던 것이다. 안중근은 도중에 쑤펀허에서 길안내자 겸 러시아어 통역으로 유동하를 대동했다. 하얼빈에서 또 다른 동지 조도선을 얻은 점 등, 그 모두가 하늘의 계시로 일이 술술 풀린 것만 같았다.

8시 30분이 지나자 대합실의 환영객들이 썰물처럼 플랫폼으로 나갔다. 이토를 태운 열차가 곧 도착할 모양이었다. 안중근은 일본인 환영객들 틈에 싸여 잽싸게 플랫폼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러시아군 의장대 뒤 일본거류민단 환영객 틈에 섰다.

안 의사 의거 직전 하얼빈 역 플랫폼으로, 러시아 의장대가 도열한 채 이토 히로부미를 기다리고 있다. ⓒ 눈빛출판사


1909년 10원 26일, 오전 9시

마침내 이토 일행을 태운 특별열차가 하얼빈 역 플랫폼에 멎었다. 그때 플랫폼 시계는 오전 9시 정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후초프 ⓒ 눈빛출판사

열차 도착에 맞춰 하얼빈 역 플랫폼에 도열한 러시아 군악대가 주악을 연주했다.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후초프는 이토 수행비서관 모리 야스지로(森泰二郞)의 안내로 객차로 들어가 이토에게 도착 인사를 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광영입니다. 각하께서는 더 먼 곳에서 오셨지요."
"저는 이미 이틀 전에 도착하여 이토 공을 기다렸습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이토는 코코후초프의 손을 잡으며 다정하게 답했다. 두 사람은 열차 내 응접실 테이블에 앉아 모리가 내놓은 따뜻한 차를 들면서 환담을 나눴다.

"이 하얼빈에서 코코후초프 대신과의 회담이 이루어진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도 동감입니다."

두 사람은 20분 정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이토가 고령임에도 북만주까지 달려온 것은 조선을 집어삼킨 일본이 만주까지 삼키고자 하는 야욕이 숨어 있었다. 이토는 그 야욕의 정지작업을 하고자 가장 껄끄러운 러시아를 구슬리기 위한 만주 방문이었다. 코코후초프가 일어서며 말했다.

"이토 공의 고견은 나중에 더 듣기로 하고 우선 플랫폼에 정열하고 있는 저희 의장대의 열병을 받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25분

특별열차에서 내리는 이토 히로부미(왼쪽에서 두 번째로 중절모를 벗고 있다). ⓒ 눈빛출판사

이토는 코코후초프의 정중한 안내를 받으며 열차에서 내렸다. 이토는 러시아 군악대 앞에서 러시아기와 일장기에 경례를 한 뒤 각국 영사들이 서 있는 곳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러시아 군악대의 연주 속에 이토와 코코후초프가 나란히 선두에 서고, 그 뒤를 나카무라 제코(中村是公) 만철총재, 가와카미 토시히코(川上俊彬) 하얼빈 주재총영사, 다나카 세이지로(田中淸次郞) 만철이사, 모리 야스지로(森泰二郞) 비서관, 무로타(室田) 귀족위원 등이 뒤따랐다.

그때 하얼빈 역 플랫폼 기둥에 달린 시계침은 막 9시 25분을 지나고 있었다. 이토는 각국 영사들과 의례적인 인사를 나눈 뒤, 일본거류민단 환영객 앞을 지났다. 그때 일본인 환영객들은 일장기를 흔들며 이토 일행의 하얼빈 방문을 열렬히 환영했다. 이토는 흐뭇하게 미소를 지은 뒤 러시아군 의장대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때 러시아군 의장대 뒤편에 있던 안중근은 그 순간을 하늘이 준 기회로 알고, 가슴에 숨겨뒀던 브라우닝 권총을 뽑아들고 앞으로 튀어나왔다. 안중근은 천재일우의 기회를 준 하늘에 감사하며 회심의 첫 발을 조준하여 쏘았다. 그때 안중근과 이토와 거리는 불과 열 발자국이었다.

첫 탄알이 이토의 팔을 뚫고 가슴에 파고들었다. 하지만 총소리가 주악 소리에 묻혀 그때까지 경비병들은 영문을 몰랐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안중근은 심호흡을 가다듬어 다시 정조준한 뒤 방아쇠를 당겼다.

만년의 이토 히로부미 ⓒ 눈빛출판사

두 번째 탄알은 이토 가슴에 명중했다. 경비병과 환영객들은 그제야 돌발 사태를 알아차리고 겁을 먹은 채 우왕좌왕 흩어졌다.

이토는 오른 손으로 피가 쏟아지는 가슴을 움켜쥐고서는 뭐라고 중얼거렸다. 안중근은 이토의 마지막 남은 명을 확실히 끊어주고자 다시 침착하게 가슴을 정조준하여 회심의 세 번째 방아쇠를 당겼다.

제3탄 탄알은 이토 복부 깊숙이 명중되었다. 이 총알이 절체절명의 이토를 확실하게 쓰러뜨렸다. 그제야 늙은 여우 이토는 꼬리를 내리고 모리 비서관 쪽으로 픽 쓰러졌다.

순간 안중근의 머릿속에는 그 자가 혹 이토 히로부미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고 만일을 대비하여 그 곁을 수행하던 하얼빈 주재 일본총영사 가와카미, 수행 비서관 모리, 만철 이사 다나카 세 사람에게도 총알을 한 방씩 안겼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안중근의 권총에 장전된 일곱 발 총알 가운데 발사된 여섯 발은 단 한 방도 헛방이 없었다. 의연한 담력과 신묘한 사격술이었다. 의로운 대한 남아가 일본 열도를 향해 던지는 불방망이였다. 영웅 안중근은 불타오르는 적개심으로 네 사람을 쓰러뜨린 뒤, 그 자리에서 러시아어로 만세 삼창을 불렀다.

"코레아 우라(대한 독립 만세)!

안 의사가 발사한 의탄으로 살상을 극대화하고자 탄두에 십자를 새겼다(일본헌정기념관 소장). ⓒ 눈빛출판사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

그런 뒤 안중근은 자신을 덮친 경비병에게 권총을 건네주며 의연하게 체포되었다. 그때가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이었다. 잠깐 사이에 안중근은 당신이 바란 대로 그 모든 걸 다 해치웠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특파독립대장 안중근 장군의 쾌거였다. 이 순간, 우리나라 백성들은 강화도조약 이래 30여 년간 쌓였던 체증을 한순간에 '뻥' 뚫었다.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일을 안중근 의사가 권총 한 자루로 통쾌히 처단했다.

세 방의 총알 세례를 받은 이토 히로부미는 곧장 열차에 옮겨졌다. 이토의 수행 의사 고야마(小山)가 맥을 짚고 캠퍼 주사를 놓고 브랜디를 입에 넣었지만 그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누가 그의 뒤를 따르랴

1910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순국하자 당시 중국 총통이었던 원세개(袁世凱)는 다음 글로 조문했다.

단지동맹유지비(엔치아, 현, 크라스키노) ⓒ 박도

평생을 벼르던 일 이제야 끝냈구려.
죽을 땅에서 살려는 것은 장부가 아니고말고. 몸은 한국에 있어도 이름은 만방에 떨쳤소.

백년을 사는 이 없는데 그대 죽어서 천년을 사오.

平生營事只今畢  死地圖生非丈夫
身在三韓名萬國  生無百世死千秋

안중근 순국하자 중국 동북지방 일대 소학교에서는 중국인이 작사작곡한 <안중근을 추모하며>라는 노래를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진실로 공경할 만하다.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고 자신도 용감히 죽었다.
마음속으로 비로소 나라의 한을 풀었다.
역사 속에 충의 혼을 우러르지 않을 자가 없었다.
천고에 길이 살아남아 있어라.
누가 그의 뒤를 따르랴.
누가 그의 뒤를 따르랴.

(* 1회 끝, 2회로 이어집니다.)
#영웅 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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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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