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단절 여성의 첫 직장, 3개월만에 끝났다

[공모-아프니까 감정노동이다] 누구보다 친절한 나였지만...

등록 2014.03.21 17:28수정 2014.03.21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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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우스운 말을 하면 모두가 웃는 순간이라도 손뼉을 치며 까무러칠 듯 웃는 사람은 나였다. 좌중을 웃기려는 의도를 명백히 품고 모두가 웃어줄 때를 간절히 기다리며 얘기하는 사람을 보면 이야기 중간에 맥을 놓쳐 웃음 포인트가 희미해졌을지라도 그의 간절함에 응답하고자 끝까지 미소를 짓고 있던 사람 중에 내가 있었다. 보다 밝고 경쾌한 반응이야말로 말하는 이에게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최대치 호의였기 때문이다.


아이 키우느라 경력단절 된 후 얻은 내 첫 직장 

특기와도 비슷했던 꾸밈없고 환한 웃음 덕분에 나는 대체로 첫인상이 좋다는 평가를 인사처럼 들었고 어떤 직종이든 최종면접까지 올라가기만 하면 최후까지 웃는 면접자는 거의 나였다. 아이 낳고 기르는 능력은 증명되었으니 경제 능력을 배양할 때가 되었구나 싶어서 소개받은 약국 일자리는 그래서 만만했다. 약국 컴퓨터 조작은 매우 간단하고 손쉬운 업무였고, 약을 건네주고 돈을 건네받는 일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니 말이다.

진열대에 오밀조밀 들어찬 약들을 보며 가짓수가 얼마나 되는 걸까 궁금하곤 했는데 진열된 약보다 더 많은 약들이 서로 키 재기 하며 좁은 틈까지 빼곡하게 쌓여있는 조제실 뒤편을 정리하고 청소하면서 내가 생전 처음 약국이란 곳에 취업해 이런 구경도 하는구나 했다. 경력이 없는 나를 잠깐 면접 보고 덜컥 채용한 약국장님은 나와 일하게 된 것이 너무 기뻐 잠을 설쳤다고 고백했고, '사무장님'이라고 직책을 붙이면서 차근차근 월급도 올려주겠다고 약속했다.

"약국에 오는 사람들은 아픈 사람들이어서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일 때가 많아요. 아픈 사람들이니까 이해해 줬으면 해요. 우리 약국에 들어오신 분들이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고 기분 좋게 돌아가시도록 같이 노력해요."

아픈 사람들을 위한 약을 정성 들여 짓고 환자의 마음까지 위무하고 싶다는 약국장님의 말에 감동 받은 나는 의사들의 히포크라테스 선서나 간호사들의 나이팅게일 선서처럼 약사에게도 그런 고결한 선서가 있겠구나! 짐작해 보기도 했다. 그 말씀을 존중하고 싶었다.


아무리 바빠도 화장을 했고 매일 아침 목걸이를 바꿔 달고 출근했다. 옷도 몇 벌 샀고 신발도 샀다. 무엇보다 환한 낯빛을 보이기 위해 환자가 약국에 오면 눈을 마주치고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면서 "어서 오세요"라고 인사를 건네고 다정하게 비타민을 건네는 순서를 지키려고 애썼다. 또 환자분이 하는 얘길 귀 기울이며 들었고, 환자분이 농담을 건네면 파안대소까지도 할 자세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난 잘하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누구보다 친절하다고 믿었던 나, 약국장님 말씀은...


어느 날 약국장님, 즉 나의 사장님께서 내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부탁 형식을 갖춘 말이었지만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조금만 밝았으면 좋겠어요."

아차 싶었다. 근래 집안에 우환이 생긴 것을 얼굴에 드러낸 게 틀림없었다. 혼자 힘으로 10년이 넘게 약국을 운영하며 집안을 일으켜온 약국장님의 눈엔 모든 것이 보이는 모양이었다. 

"00씨가 좀 더 적극적으로 밝게 환자분을 대해주면 내가 환자에게 복약지도 하는 게 좀 수월해질 것 같아요. 00씨가 가라앉아 있으면 나도 힘이 들어요. 목소리도 좀 높였으면 좋겠어요. 작아서 못 알아듣겠어요."

갈수록 태산이었다. 밝지 않을 뿐 아니라 어둡다는 말이었다. 약국장님의 기운을 뺄 정도로. 아픈 환자분들은 오죽하겠느냐는 말이 생략된 것으로 들어도 무방한 말이었다. '특히' 잘 웃던 사람은 어느새 생활의 어두침침한 그림자가 깔린 칙칙한 중년 아줌마가 되어 있었단 말인가.

 아픈 사람들을 위한 약을 정성들여 짓고 환자의 마음까지 위무하고 싶다는 약국장님의 말에 감동 받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사진은 드라마 <솔약국집 아들들> 한 장면.
아픈 사람들을 위한 약을 정성들여 짓고 환자의 마음까지 위무하고 싶다는 약국장님의 말에 감동 받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사진은 드라마 <솔약국집 아들들> 한 장면. KBS2 제공

이젠 웃어도 밝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인가. 웃는 방법을 연습해야 할 것 같았다. 화사한 화장술도 필요한 것 같았다. 밝고 환한 내 모습을 증명해야 했다. 이른 아침 약국 문을 열고 약국장님께 출근보고 전화를 할 때부터 목소리를 가다듬어 최대한 경쾌한 울림을 주려고 애썼다.

"저 출근했습니다아! 이따 뵐게요오!"

병원 진료가 시작되는 시간에 출근하는 약국장님의 모습이 약국 유리 건너로 보이면 얼굴 표정에 유의하며 입꼬리를 최대한 올리고 인사했다. "약 나왔습니다. 돈 받았습니다"라는 말을 할 때도 환자분이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목청을 돋웠다.

동네 약국이라 나이 드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오랜 단골이어서 귀가 어두운 분들이 많았다. 약사님의 복약지도가 소리 지르듯이 끝나면 나도 덩달아 소리를 높여 약을 쥐어 주고 돈을 건네받았다. 표정을 일그러뜨리지 않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 가능하도록 했다.

그렇게 두 달을 지냈다. 아침마다 들어 올리는 약국 셔터가 갈수록 무거워졌다. 환자가 없을 때엔 약 쪼개기 같은 잡일 한다는 핑계로 조제실 뒤로 숨었다. 눈을 멍하게 내버려 두고 입꼬리를 내려도 되는 장소에 숨어야 좀 쉬는 기분이 들었다. 저녁에 집에 돌아가선 거실에 널브러진 애들 물건을 툭툭 차며 소리를 지르는 일이 잦아졌고, 그때 내 표정은 결코 부드럽게 펴지지 않았다.

"소리 지른 거 미안해. 엄마가 좀 피곤하다."

주섬주섬 물건을 정리하는 아이들에게 사과하면서도 아이들을 껴안아 주진 못했다. 겨우 저녁 준비할 수 있을 만한 힘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지쳐가는 중이었지만, 전업주부 생활이 너무 길어서, 혹은 예민하고 불안한 내면을 감출 수 없어서 라거나 사명감이 약해서 등등의 이유를 혼자 묻고 대답해가며 나를 다그치는 데 더 힘을 쏟았다. 거기까지였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안 될까요?" 

기어이 약국장님은 이 말을 건넸고, 내 귀에 땡! 종소리가 들렸다. 끝이로구나. 많지 않은 월급이었지만, 생활비에 보탬이 될 만큼이었고 가련한 경력 단절 여성의 일자리를 알아봐 준 나의 지인에게 미안해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했었다.

경쾌한 감정 최대한 끌어올렸지만, 3개월 만에 끝났다

익숙해지면 괜찮아지겠지 싶었고 약국장님은 분명 철학이 있는 분이었으므로 그분 말대로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될 것도 같았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경쾌한 감정을 최대한 끌어올렸는데도 목표치엔 모자랐고, 이젠 감정을 위장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까진 할 수 없었다. 면전에서 아직 덜 급한 거지라는 비아냥을 들어도 별수 없을 것이었다.

나의 직장생활은 3개월을 겨우 채우고 끝났다. 슬펐다. 나이 먹었고, 웃어도 밝지 않고, 목소리도 작고, 근성도 부족한 아줌마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아이를 키우면서 감정의 바닥을 수시로 경험하고 많이 겸손해졌다고 여겼지만, 약국 일은 내 바닥 치가 더 낮은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덧붙이는 글 아프니까 감정노동이다 기사공모글입니다
#감정노동 #밝게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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