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페이스북에 전전긍긍할까

[서평] '유동하는 현대'의 감시 <친애하는 빅브라더>

등록 2014.03.21 12:10수정 2014.03.21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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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는 주말도 평일이다. '그'는 직장 상급자의 전화를 기다리기까지 한다. 오지 않으면 내내 불안해진다. 마침내 전화벨이 울린다. 상급자다. 바람 같은 속도로 통화 버튼을 누른다. '네, 네'를 연발하며 업무를 지시 받는다.

좋다. 차라리 기회라 여기자. '그'는 관점을 바꾼다. '그'는 스스로 상급자의 '감시' 아래 놓이기를 바란다. '그'는 상급자의 '명령'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내려졌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이미 '배제'의 길을 걷고 있는 또 다른 '그'가 문득 떠오른다. '그'는 아직 상급자의 가시권 안에 있다. 문득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그'는 어떤 사람일까. 잘리지 않고 그저 일하기만을 바랄 뿐인 아주 평범한 직장인일 수 있다. 승진에 목숨을 거는 출세와 처세의 달인일 수도 있겠다. 여차하면 해고될 수 있는 처지에서 계약서에 다시 서명하기를 바라는 비정규 직장인일지도 모른다. 요컨대 '그'는 유별난 사람이 아니다. '그'와 비슷한 사람이 우리 주변에는 흔하디 흔하다.

평범한 '그'는 왜 자발적으로 상급자의 '감시' 아래 놓이게 된 걸까. 조지 오웰은 유명한 <1984>에서 빅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상급자를 '빅브라더'로 여기는 걸까. 그럴지 모르겠다.

그런데 미심쩍은 게 있다. 이 책 대담자들의 문제 의식마따나, '그'는 왜 자신을 '감시'하는 '빅브라더'로 볼 수 있는 상급자에게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는 걸까. 분명 기분 나쁠 '감시'과 '명령'에 왜 '그'는 오히려 충성하고 복종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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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빅브라더> ⓒ 오월의봄

<친애하는 빅브라더>는 '유동하는 현대'라는 개념으로 급변하는 현대 세계를 사회학적으로 조명하는 데 꾸준한 관심을 기울여 온, 폴란드 출신의 영국 노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 스코틀랜드 출신의 캐나다 사회학자인 데이비드 라이언의 이메일 대담을 묶은 책이다. 3년 전(2011년 9월~11월)에 이루어진 대담이지만 저자들의 문제의식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저자들이 주고받은 대담의 방향과 주제는 책 제목이 강하게 암시해 준다. 우리를 훔쳐보는 감시사회에, 왜 우리는 침묵하고 협조하는가. 우리는 왜 '빅브라더'에 저항하지 않는가. 그 이유를, 대담의 실질적인 주인공인 지그문트 바우만은 자신의 '유동하는 현대'의 질적 특성에서 찾는다. 그 핵심에 '배제'라는 개념이 있다.


오늘날 감시 기술은 대립하는 전략적 목적에 봉사하는 두 개의 모습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울타리 안에') 가둬놓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울타리 밖으로') 배제하는 것입니다. (97쪽)

바우만은 '배제'를 설명하기 위해 '바놉티콘(banopticon)'이라는 개념을 끌어온다. 제레미 벤담이나 미셸 푸코가 중시한 '파놉티콘(panopticon; 일종의 원형 감옥. 소수가 다수를 감시하는 시스템)'에서와 달리 바놉티콘 시스템에서는 피부색이나 억양 등 프로파일링(사람들을 인종이나 나이 등의 특징에 따라 분류하는 것)된 주변인들이 감시 대상이 된다.

자발적 감시의 사회

문제는 이러한 바놉티콘 방식의 감시 시스템이 개인의 자발적 복종으로 완성된다는 점이다. 이는 국가와 같은 거대하고 억압적인 통치 기구와 무관하다. '유동하는 현대'에서 개인들은 기업이나 기관들이 자신들의 개인 정보와 행동 양태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 과정에서 각 개인들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감시 시스템 구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바우만은 노르웨이 출신의 사회학자인 토마스 마티센의 '시놉티콘(synopticon)'을 빌려 온다. 시놉티콘은 '소수가 다수를 주시'하던 파놉티콘과 '다수가 소수를 주시'하는 오늘날의 매스미디어를 대비시키면서 만든 말이라고 한다.

바우만은 마티센의 시놉티콘을 'DIY(Do It Yourself)식 파놉티콘', 곧 '감시자 없는 감시'로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관리자의 책무로 여겨지던 '감시'가 이제는 관리대상자에게로 전가되고 있다. '열의'라는 위장책과 기만으로 관리대상자들이 스스로를 감시하게 만드는 식이다.

시놉티콘이 파놉티콘을 대체함으로써 이제는 수감자를 경비하기 위해 무거운 벽을 세우고 경비탑을 세울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대신에 수없이 몰려드는 감시자 무리를 고용하여 그들이 미리 정해진 절차를 따라가도록 만들 필요가 생긴 겁니다. ··· 이제 자기를 스스로 규율하고 그것을 양산하는 데에 드는 정신적·육체적 비용을 감당하는 사람이 관리적 규율의 대상이 됩니다. 그들은 스스로 벽을 세워 자기 의지에 의해 그 안에 머무르게 될 것입니다. (109쪽)

바우만은, 자율적이기는 해도 사전에 편성된 행위를 통해 데이터베이스를 시놉티콘적으로 생산하는 사람들이 구글이나 페이스북 서비스의 '사용자들'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바우만에게 중요한 것은 '자율'이 아니라 '사전에 편성된 행위'다. 사람들이 구글이나 페이스북에서 실행하는 행동들이 과연 순수한 자발적 의지의 결과물로 간주될 수 있을까. 그것들은 '이미' 조직되어 있는 항목들 중에서 '선택'된 것일 뿐이지 않을까.

이 모든 일들은 사실 소셜미디어의 본질적 특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바우만은 소셜미디어의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잠자리 크기, 혹은 창틀에 편안하게 걸터앉는 벌새 크기 정도로 축소된 무인비행체의 예를 든다. 무인비행체 기술자들은 앞으로 그 크기를 벌레 정도로 줄이려 한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그것의 감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

만약 무인비행체 운영자와 페이스북 계정 운영자 간의 모임이 있다면 그곳에서 과연 무슨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요? ··· 그들은 절묘하게 이루어진 '사회적 분류'를 야기하고 유지하며 확장하는 게 아닐까요? 나는 현대판 감시의 가장 현저한 특징은 그것이 겉으로는 대립하는 둘을 결과적으로는 조화를 이루도록 회유하고 강제한다는 점, 그리고 둘을 동일한 서비스 내에서 서로 협력하도록 한다는 점이라고 믿습니다. ··· 이제는 감시가 공포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결코 다시는 홀로 남겨지지 않게 되는" (버려지지 않고, 무시받지 않고, 방치되지 않고, 가입이 거부되지 않고, 배제되지 않는 등의) 희망을 재구성하게 됩니다. 주목받는다는 사실에서 오는 즐거움이 폭로의 즐거움을 억제하게 되죠. (40~41쪽)

"사람들에게 가까워질수록 더 멀어졌어요"

바우만은 우리가 비밀을 갖고 있는 것에서는 더 이상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개인 정보의 교환을 핵심으로 하는 소셜 네트워킹에서 사용자들은 자신들의 내밀한 모습을 세세하게 폭로하고, 정확한 정보를 웹사이트에 올리며, 사진을 공유하는 것에서 행복감을 느낀다. 이 대목에서 바우만은 대부분의 사회생활이 이미 전자적으로 매개된 지 오래인 한국의 예를 든다.

한국에서는 사회생활이 이미 전자적 삶이나 사이버 공간에서의 삶으로 변해버렸습니다. 한국은 대부분의 '사회생활'이 컴퓨터, 아이팟, 모바일 회사 안에서 수행되고 있습니다. 피와 살을 가진 존재들과의 사회생활은 부차적일 뿐이죠. (48쪽)

바우만에게 디지털적으로 매개된 관계 맺기는 많은 문제를 갖는다. 그의 문제의식은, 그가 인용하는 한 독일 광고인의 일화를 통해 잘 드러난다.

최근 나는 내 페이스북 친구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트위터, 페이스북··· 이 모든 것들은 사람들과 당신들 사이를 좀 더 가깝게 만드나요, 아니면 더 멀어지게 하나요?" ··· 내 페이스북 질문에 대한 적절한 답변은 내 친구 제이슨이 잘 요약해 보여준 것 같다. ··· "사람들에게 가까워질수록 더 멀어졌어요." 그리고 일 분 후에 이렇게 썼다. "하지만 사람들에게서 더 멀어지기는 했겠지만 나는 그들과 그런대로 가깝긴 해요." 그리고 다시 덧붙였다. "좀 혼란스러워졌네요."  (60~61쪽)

바우만은 우리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얻은 것은 네트워크지 공동체(community)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의 비유에 따르면, 네트워크와 공동체는 분필과 치즈만큼이나 다르다. 공동체에 속한다는 것은 네트워크를 가진다는 것보다 훨씬 더 안정적이고 신뢰할 만한 조건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안정'이 아니라 '자유'에 관한 한 공동체는 네트워크에 필적하지 못할 테지만 말이다.

글머리의 '그'에게로 돌아가자. '그'는 누구일까. '그'는 '우리', 곧 수많은 '나'와 '너'다. 바우만은 그 '나'와 '너'들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가질까. 프라이버시의 누출을 두려워하면서도 자신의 내밀한 속내를 페이스북의 낯선(!) '친구'들에게 기꺼이 공개하는 모순적인 그들에게 그는 무슨 이야기를 할까.

바우만은 결론에서 성서의 성인들을 언급한다. 왜 그랬을까. 그는 우리가 성인들의 현존 없이는 인간다울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성인들이 우리에게 취할 수 있는 길이 존재함을 증명해 보인다고 주장한다. (온라인이 아니라) 오프라인에서 살아가는 '진짜' 인간에 대한 희망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덧붙이는 글 <친애하는 빅브라더> (지그문트 바우만·데이비드 라이언 대담, 한길석 옮김 | 오월의봄 | 2014. 2. 20. | 247쪽 | 15,000원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친애하는 빅 브라더 - 지그문트 바우만, 감시사회를 말하다

지그문트 바우만 & 데이비드 라이언 지음, 한길석 옮김,
오월의봄, 2014


#<친애하는 빅브라더> #지그문트 바우만 #데이비드 라이언 #오월의봄 #감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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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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