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문제, 당신은 정말 잘 알고 있나요?

'2014 평화나비콘서트'를 준비하는 한 학생의 부끄러운 고백

등록 2014.03.25 19:00수정 2014.03.25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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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1112차 수요시위'에 참석한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일본군 위안부 범죄의 진상규명과 공식사죄를 촉구하며 '할머니들 힘내세요'라고 적힌 피켓을 들어보이고 있다. ⓒ 유성호


나는 대학 새내기 시절부터 불의를 접하면 잘 못 참는 다혈질, 행동파 학생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집회, 시위 현장에 자주 찾아간다. 그런 나에게 '위안부' 문제는 '당연히' 알고 있고, '당연히'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다. 그렇지만 한미FTA, 쌍용차 문제, 국정원 대선개입처럼 당장 분기탱천하게 만드는 시국 '현안'은 아니었다.


위안부 문제는 한국 사람이니 당연히 분노하게 되고, 당연히 해결되어야 하는, 그렇지만 너무 오래돼서 당장 나서지는 않게 되는 일이었다. 그랬던 내가 수요시위에 처음 나가게 된 결정적 계기는 한 할아버지 덕분이었다.

2011년 나는 총학생회 부회장이었다.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던 8월께, 백발에 배추도사처럼 흰 수염을 기른 할아버지가 땀을 뻘뻘 흘리시며 총학생회실로 들어오셨다. 학생이 아닌 이들이 총학생회실을 찾을 때가 종종 있다. 그 중에는 대학생 대상 프로모션을 진행하려는 업체들도 있었다.

그런 말쑥한 정장차림 아저씨들 말고도 어르신들도 가끔 오셨다. 그 중엔 정문 앞 재개발 문제, 철거민 문제 같이 마땅히 나서야 할 일들을 호소하러 오시는 분들도 계셨다. 그렇지만 아주 가끔 개인적인 사연들을 좀 해결해달라고 오시는 분들이 계셨다. 아들이 억울하게 사기를 당한 일, 딸이 사업이 망했는데 빚쟁이들이, 뭐 이런... 안타깝지만 총학생회가 뭘 어떻게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오랫동안 하시는 분들도 계셨다.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때는 안타깝지만 그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할아버지를 만난 후 내가 너무 부끄러웠다

그래서 그날도 궁금 반 피곤 반으로 할아버지를 맞았는데, 뜻밖에 할아버지는 장사꾼도 아니셨고, 하소연하러 온 것도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 인권활동가셨다.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시민기금을 모으고 있다고 했다. 또 학교마다 이렇게 찾아다니며 이를 알리고 있다고 했다. 조금만 걸어도 땀이 뻘뻘 나는 한여름에 할아버지께서 젊은이들을 찾아 뛰어다니며 기금을 마련하고 있다고 하니, 죄송하고 부끄러웠다.


그 뒤로도 한 참이 지나, 난 처음으로 수요집회에 나가게 됐다. 할아버지는 지금까지도 정말 우렁차게 "일본군은 사죄하라"라는 구호를 외친다. 진짜 분노를 담아서. 젊다고 청년이 아니라, 저 기백과 빛나는 눈빛, 스무 살 젊은이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열정까지... 이런 게 정말 '청년'의 표상이지 않나. 마음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만드는 할아버지다.

김판수 할아버지만큼 '청년'같은 이를 난 아직 본적이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이듬해인 2012년 할아버지와 같은 분들의 발품과 땀방울로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이 지어졌다. 기쁜 마음으로 2012년 봉사동아리를 같이하던 후배들과 함께 그곳을 찾았다. 그동안 위안부에 대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는 그곳에서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다들 알고 계셨나? 일본군이 있던 곳에는 어디든, 중국이든 인도네시아든 '위안소'를 차려놨단 사실을. 위안부에 끌려간 13살, 15살이었던 '소녀'들이 20만명으로 추산되고, 실제로는 더 많아단 사실을? 그 아이들이 하루에 30~40명의 일본군을 상대해야 했다는 사실을? 생리 중에도 솜을 틀어넣고 그 만행을 당해야 했다는 것을? 얼마나 우린 생생하게 알고 있는가. 아직도 살아서 대사관 앞에서 구호를 외치는, 일생의 한이 가슴속에 맺히고 맺힌 그 할머니들의 고통을 우리가 얼마나 알고 있었는가.

몰랐다. 난 정말 무지했고 자만했다. 정말 숨고 싶은 마음이 들게 부끄러웠다.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그 날 참 엉엉 울었다. 그 뒤 난 시간이 될 때마다 수요시위 현장을 찾았다. 그렇게 수요시위를 알고 참여하게 된 지 2년째, 나도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넘어서 어떻게 하면 진짜 해결할까, 라는 고민이 생기기 시작했다.

26일 평화나비 콘서트 두 번째 이야기가 펼쳐진다

고요하게, 매주 있는 수요시위. 이름은 '시위'지만 사실 너무나 평화로운 그 수요일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대규모로 결집하는 폭발적인 행동이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 이것은 콘서트가 되었다. 그게 바로 지난해 7월 열린 '2013년의 평화나비 콘서트'다.

첫 콘서트 현장은 실로 놀라웠다. 사회과학동아리는 망해가고 밴드는 흥한 지 오래 됐고  대학생들의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은 끝났지, 라는 생각에 회의적이던 나였다. 그런데 평화나비 콘서트 서포터스 모집 공고를 올린 지 2주만에 150명이 모였다.

집회도 서명도 다 낯설었지만 '위안부' 문제가 마음 언저리에 남아 아픈 학생들이 나서서 4000명에게 서명을 받고 모금을 했다. 학교 안에선 위안부 문제를 알리는 판을 열기도 했다. 신촌과 동대문에서 동아리들을 모아 '평화 나비 버스킹'을 했고 수요일마다 도심에서 서명을 받으며 시민들을 만났다. 그리고 전적으로 대학생의 힘으로 시청광장에서 1500명이 참석하는 평화나비 콘서트를 열었다.

그리고 드디어 26일 두 번째 콘서트가 열린다. 3월 26일은 애니메이션 '소녀이야기'의 주인공 정서운 할머니의 기일이기도 하다. 일베(일간베스트 저장소)가 난무하고 교학사 교과서가 학교를 파고드는 이때, 대부분이 14학번 새내기인 150명의 서포터스가 이번에도 역사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수익금으로는 '평화의 소녀상'을 세울 예정이다.

물론 사람들의 관심만큼 콘서트 참가자가 많을까라는 걱정도 된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 내일 참여를 부탁드리며 수줍게 홈페이지 주소를 남긴다. 콘서트에서 만나요!

☞ 콘서트 홈페이지 바로 가기
#평화나비콘서트 #위안부 #평화나비 서포터즈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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