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알고있던 소녀는 행복하지 않았다

[서평] 김려령의 <우아한 거짓말>

등록 2014.03.27 17:25수정 2014.03.27 17:25
0
원고료로 응원
봄이 됐다. 겨우내 잿빛이던 가로수들도 물이 올라 초록빛이 돌고, 길바닥에 아지랑이도 꼬물거린다. 추운 겨울 다 죽은 것처럼 거무죽죽하던 모든 것들이 생기를 찾는 이 계절이 그저 신기할 뿐이다.

생명의 계절 봄이 왔다. 이 좋은 날에 우연히 무거운 주제의 이야기를 접한다. 영화로도 상영되고 있는 소설은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하며 피어 오르는 봄처럼 한창 피어나던 어린 중학생의 갑작스런 자살을 둘러싼 가슴 아픈 이야기, <우아한 거짓말>이다.


평범한 일상 속의 전쟁

a

<우아한 거짓말> 표지 <우아한 거짓말>은 가난, 장애, 소외를 안고 사는 사람들을 위한 헌정 소설<완득이>의 저자 김려령이 학교폭력에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하는 소설이다. ⓒ (주)창비

<우아한 거짓말>은 집단 따돌림, 즉 왕따라고 하는 문제에 대한 또 다른 시각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오쿠다 히데오의 신작 <침묵의 거리에서>가 한 중학생 남자아이를 향한 집단 폭력과 따돌림을 다루고 있다면, 김려령의 <우아한 거짓말>은 여중생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관계의 내밀한 복잡성을 고발한다.

자살을 선택한 주인공 '천지'가 다니던 학교의 같은 반에는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미소'라는 친구가 있다. 이야기는 독자들의 예상을 깨고 작가 정유정이 추천사에서 소개했듯이 '치고 빠지는 변칙복서 같은 대사'를 이용해 등장인물들의 지극히 사적인 일상을 파고든다.

소설의 시작과 함께 세상을 떠나는 천지가 유지하던 관계망은 단순하다. 여자들로만 구성된 가족(엄마와 언니), 친구이자 적(화연),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지만 결국 구경꾼(미라), 그리고 옆집 아저씨(추상박) 등이다. 그래서 소녀, 천지는 언뜻 행복해 보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난생 처음 경험한, 가장 친한 친구가 휘두르는 칼날과도 같은 세치 혀의 놀림을 피하기엔 너무 어렸다.


"부인하고 딸들까지 있는데, 무슨 자살을 하냐? 그러니까 천지가 음침하지."

천지의 절친을 자처하던 화연이 다른 친구들 있는 데서 근거 없이 한 말이다. 이 말을 하고 나서도 화연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저 장난을 좀 친 것 뿐이다.'라고 생각할 뿐이다. 세상을 아직 온전하게 바라볼 수 없는 천지는 마음의 상처가 덧나 곪도록 고통을 친구처럼 달고 살다가 결국 잘못된 선택을 하고 말았다.

우리가 사는 세상

a

영화 <우아한 거짓말>의 한 장면. ⓒ (주)유비유필름


아파트가 납골당과 같다고 표현한 어떤 이의 말에 격하게 공감했던 기억이 있다. 밤중에 층층이, 칸칸이 만들어 놓은 좁은 공간에 사람들이 누워 눈을 감는다고 생각하니 끔찍했기 때문이다. 아파트의 폐쇄적인 구조 상 대부분의 주민들은 아래층과 위층, 그리고 옆간에 누가 사는지 모른다.

아이들은 유치원 아니 놀이방에서부터 사각의 틀 안에서 생활한다. 제 아무리 넓은 평수를 자랑해 봐야 드넓은 대지에 비하면, 좁은 교실, 좁은 학원, 좁은 집, 좁은 차 안에서 살아야 한다. 정신적으로 잘 산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 아닐까? 오죽하면 탁 트인 공간에서 놀이를 밥처럼 주고 있는 마을이나 학교에 관한 이야기가 특종으로 매스컴에 등장할까.

사회성이 결여된 어른이 키우는 아이들이 조화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했으면 하는 기대는 망상에 가깝다. 천지가 다니던 여자중학교는 천지의 죽음을 '신상비관으로 인한 자살'이라고 잠정적 결론을 내린다. 이것은 결국 그냥 결론으로 매듭지어질 것이다. 유서도 없고 교우관계에서 특별히 대외적으로 문제가 불거진 일도 없으니 학교라는 조직은 관례적으로 이러한 무책임한 결론을 돌출해 낼 수 있다.

'흔들리지 마세요. 스스로 문제아라고 낙인 찍지도 마세요. 나는 언제든지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천지네 학교의 교내폭력방지 캠페인 문구가 공허하다. 문제의 초점을 조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 폭력의 재발견

오쿠다 히데오는 소설 <침묵의 거리에서>를 통해 결코 왕따문제가 쉽게 해결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망적인 시선을 던졌다. 소설 속에는 왕따를 당하다 맥없이 죽게 된 나구라의 뒤를 이을 왕따후보, 후배 '오기와라'라는 학생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려령의 <우아한 거짓말>은 학생들 간의 문제를 대하는 결이 조금 다르다. 그녀의 또 다른 베스트셀러 <완득이>에서 보여줬던 발랄한 결말하고는 당연히 온도차가 있겠지만,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 인물들의 문제해결을 위한 몸부림은 절망을 빗겨나간다.

또한 이야기 속 희망적인 단서들을 통해 왕따 문제를 재발견할 수도 있다. 우리가 최우선적으로 할 일은 집단 따돌림이나 교우간 발생할 수 있는 정신적 폭력 등과 같은 학교사회의 문제는 좀 더 복잡할 수 있다는 저자의 전제에 동의해야 하는 것이다.

각 인물들의 개별 관계마다 작가의 세심하고 친절한 관심이 녹아 있는데 이는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으로 읽힌다. 학생은 학교에서 공부만 잘하면 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학생 자신과 어른들이 깨달을 필요가 있다는 거다.

아이들 간의 관계가 어른들이 맺는 관계보다 더 복잡하고 미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집단 따돌림의 특성상 희생자가 언제든, 어떻게든 새로 발굴될 수 있고 가해자 또한, 곧 희생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국은 두 소설 <침묵의 거리에서>와 <우아한 거짓말>에서 공통적으로 고발하는 사실이 있다. 집단 따돌림이 겉으로 보기에도 문제가 많아 보이는 이른바 '날라리'들만 일으키는 사건 사고가 아니라 그야말로 '평범한 아이들'이 일상에서 언제든, 어디서(특히, SNS와 같은 사이버공간)든 저지를 수 있는 폭력이라는 점이다. 이 잔인한 폭력이 '침묵'이나 '우아함'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비극적이다.
덧붙이는 글 <우아한 거짓말>(김려령/(주)창비/종이책 초판 2009년 11월 20일)

우아한 거짓말

김려령 지음,
창비, 2009


#우아한 거짓말 #왕따 #학교폭력 #천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금반지 찾아준 사람이 뽑힐 줄이야, 500분의 1 기적
  2. 2 검찰의 돌변... 특수활동비가 아킬레스건인 이유
  3. 3 '조중동 논리' 읊어대던 민주당 의원들, 왜 반성 안 하나
  4. 4 '윤석열 안방' 무너지나... 박근혜보다 안 좋은 징후
  5. 5 "미국·일본에게 '호구' 된 윤 정부... 3년 진짜 길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