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7시 20분. 전자물류센터 정문 앞이다. 가전설치기사들은 오전 7시30분까지 출근한다. 늦어도 오전 8시까지는 출근하며 송장리스트(배송설치할 제품리스트)를 받고 상차(제품을 차에 싣는것)를 하고 오전 9시전에는 물류센터를 떠난다.
송태원
2005년 이맘때쯤 일자리가 구해지지 않아 두어 달 쉬고 있을 때였다. 친한 친구와 오랜만에 만났다. 우리집 근처에서 일이 끝났다고 함께 저녁을 먹었다. 돼지국밥집에서 나는 소주도 한 병 시켰다. 친구는 운전도 해야 하고 내일도 오전 7시30분까지 회사에 출근하려면 새벽에 일어나야한다고 해서 술은 권하지 못했다.
"○○전자면 대기업인데 잘 됐네. 니도 이제 자리잡았네. 축하한다"라며 지친 친구에게 말했다. 친구는 "○○전자에게 일한다고 엄마가 동네에 자랑도 하고 너무 좋아하다"며 돈도 모으고 올해는 결혼도 할 거라며 이를 악물고 일하고 있다고 하였다. 건네준 명함에는 '○○전자 CS매니저'라는 문구와 '저는 항상 친절합니다'라는 문구가 있었다.
며칠 후 친구로부터 부기사(혹은 보조기사)가 그만두었는데 하루만 도와달라는 전화가 왔다. 그날 이후 1년 가까이 친구와 함께 ○○전자 물류배송설치기사 일을 하였다. 냉장고, 세탁기, TV 등 가전제품을 배송하고 사용법을 설명하고 간단한 작동시범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주기사가 주로 고객응대를 하고 부기사는 주기사의 일을 보조하며 지시를 따라 일하면 되는 것이다.
2.5톤 탑차에 가전제품을 가득 싣고 단순하게 배달하는 육체노동일 거라는 생각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한 번쯤 해피콜 전화를 받아본 적이 있을 것이다.
"고객님 ○○제품은 잘 받으셨습니까. 기사분의 설치에 대해 매우만족, 만족, 보통, 불만…." 해피콜 결과에 따라 주기사의 다음 달 등급, 배송물량이 결정된다. 주기사의 90%는 지입차주로 배송물량에 따라 수입이 결정된다.
짜장면 미끼로 이것저것 부탁... 그뿐만이 아니었다 벽걸이 TV를 설치했던 집에서 있었던 일이다.
49평수인 아파트 거실에 벽걸이 TV를 설치하였다. 벽에 구멍을 뚫고 거치대를 설치하고 TV를 걸었다.
"기사님들 식사할 때가 됐는데, 짜장면 어떠세요"라며 고객이 말하였다. "사모님 괜찮습니다. 말씀만으로도 고맙습니다"라며 주기사는 대답하며 일을 하였다.
"애들 방을 바꾸면서 액자걸 게 몇 개 있는데 액자 걸 나사 몇 개만 박아주세요"라며 고객이 부탁하였다. 나는 아파트 콘트리트벽에 드릴로 구멍을 뚫고 나사를 박고 액자를 걸어주었다.
"짜장면을 시켜놓았는데 드시고 가세요. 일은 천천히 하세요"라며 본격적으로 이것저것을 시켰다. 소파도 옮기게 하고, 김치냉장고와 양문형 냉장고의 위치도 바꾸게 하고 짜짱면을 미끼로 여러 가지 요구사항이 많았다.
거절할 기회를 놓친 친구와 나는 벽걸이 TV설치와는 무관한 사모님의 집안일을 하고 있었다. 짜증나는 일이지만 중간에 거절하면 이 고객은 클레임(불만)을 걸 사람이라는 것을 친구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주기사는 "제품에 대해 궁금하시거나 사용 중에 불편한 점 있으시면 언제라도 전화부탁드립니다"라고 명함을 건네며 허리를 숙이고 그 집에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