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학동산의 임산부 살해사건, 다신 일어나선 안 돼

제주 4·3평화공원을 가다... 제주4·3 큰 생채기, 해원의 굿으로 풀라

등록 2014.04.03 16:19수정 2014.04.03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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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념일 4.3희생자 추념일 펼침막 ⓒ 이윤옥


나는 비어있다
나를 채우는 것은 바람뿐
무성히 자란 풀을 깎지 마라
향을 피워 내게 절을 하지 마라

내게는 굶주림
내게는 컴컴한 동굴
내게는 바닷고기에 뜯기는
총 맞은 시체
나는 비어 있다
이제는 돌려다오
내 사타구니를 돌려다오
내 젖가슴을 돌려다오

내 속빈 창자를
내 눈망울을 감겨다오
내 이름을 돌려다오.

제주 4·3평화공원 안 제주 4·3 국가추념일 공식지정 기념 시화전 '꽃비 내리는 봄날에' 전시된 김규중 시인의 시 <헛묘>다. 시인은 "내 사타구니를, 내 젖가슴을, 내 속빈 창자를 돌려달라"고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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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평화기념관 제주 4.3평화기념관 전경 ⓒ 이윤옥


평화로운 섬 제주. 67년전 이 곳에서 역사에 씻을 수 없는 대학살극이 빚어졌다. 제주 주민 아홉 명 가운데 한 명이 살해당한 그 비극의 사건, 이름하여 제주 4․3사건. 그 비극의 역사를 기리는 봉개동에 자리한 제주 4·3평화공원을 기자는 '4․3추념식' 하루 앞서 지난 2일 오후에 찾았다.

하늘은 청명했다. 살랑대는 봄바람에 전국에서 제주로 수학여행 온 차들로 주차장은 초만원이었다. 그날의 비극을 아는지 모르는지 학생들은 삼삼오로 히히덕거리면서 바람의 언덕을 거닐고 있었다.

제주 4·3 사건이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탄압에 의한 저항과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위는 제주 4·3평화기념관에 기록된 제주 4·3사건에 대한 정의다. 좀 더 제주 4·3 사건에 대해 살펴보자. 제주 4·3사건은 미군정기에 발생하여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 이르기까지 7년여에 걸쳐 지속된 한국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인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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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사건희생자 유골 발굴 제주 4.3사건희생자 유골 발굴을 통해서 묻혀온 역사와 진실이 드러났다(제주 4.3평화기념관 자료) ⓒ 이윤옥


1945년 미군정당국의 정책 실패와 사회문제 등으로 민심이 불안한 상황에서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로 주민 6명이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자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남한 단독선거, 단독정권 수립 반대를 목표로 봉기, 12개 경찰지서를 습격하여 경찰과 극우단체 회원이 죽었다.

이에 분노한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 토벌대가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무자비한 진압을 벌였고 이때 3만여 명의 희생이 따른 것이다. 이 때 죽은 3만이란 숫자는 제주도민의 1/9 정도가 되기도 하지만, 이 희생자 가운데 33%가 노약자와 여성이며, 무차별적인 학살이 일어났다는 데 문제가 있다. (<제주4.3특별법>에 의한 조사결과로는 사망자만 14.032명-진압군에 의한 희생자 10,955명, 무장대에 의한 희생 1,764명-이다.)

미군정, 제주를 빨갱이섬이라 규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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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보고서 제9연대 대량학상계획에 대해 기록한 미군 보고서. 1949.4.1(제주 4.3평화기념관) ⓒ 이윤옥


문제는 미군정이 제주도민의 70%가 좌익 동조자라 하여 제주도를 '빨갱이섬(Red Island)'이라고 낙인찍은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미군정 제주지구 사령관 브라운 대령이 억압에 의한 민심 폭발이라는 여론을 무시하고 "원인에는 흥미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라고 뜻을 밝힌 것이 더욱 희생을 부추겼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뒤 정부는 제주도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군 병력을 증파하여 강력한 진압작전을 펼쳤다. 11월 17일에는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중산간 마을을 초토화 시키는 대대적인 강경 진압작전이 펼쳐졌다. 제주도 전역에서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수많은 양민들이 집단적인 죽임을 당했다. 이때 토벌대는 물론 극우 서북청년단에 의해 제주는 힘없는 양민들의 붉은 피로 물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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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 명령 이승만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가혹하게 탄압하라"고 명령했다. ⓒ 이윤옥


비학동산에서 저지른 임산부 살해 사건

"1948년 12월 10일 경찰은 하귀리의 속칭 '비학동산'에 들이닥쳐 가족 가운데 젊은 남자가 없는 집안의 사람들을 끌어내 총살했다. 경찰은 임산부를 발가벗겨 나무에 매달아 놓고 대검으로 찔러 죽였다"(제주 4.3평화기념관 자료)

이처럼 토벌대는 무자비한 살해를 자행했는데 특히 여성들은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성적 유린까지 당하는 등 이중으로 고통을 겪었다. 1948년 12월 토산리에 들이닥친 군인들은 18~40살까지의 남자들뿐 아니라 20살 미만의 젊고 여자들을 끌고 갔으며 이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예비검속자(범죄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이유로 사전에 구금하는 것을 말함)와 내륙지방 형무소 재소자 등이 또다시 희생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1948년 6월과 7월 두 차례에 걸쳐 열린 불법적인 군법회의 결과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제주도민 2만5000명이 1950년 7월 이승만 정부에 의해 집단 학살되는 비운을 겪었다.

다랑쉬 굴의 비극은 되풀이 되지 말아야

가장 악랄한 사건의 하나가 다랑쉬 굴의 비극이다. 다랑쉬 굴을 발견한 제주 4·3연구소는 1992년 3월 29일 <제민일보> 4·3취재반과 합동으로 현장조사를 한 결과, 다랑쉬 굴 사건의 전모를 밝혀냈다.

1948년 12월 18일 제9연대 제2대대 군인들은 다랑쉬 마을 근처에서 피난민과 그들의 은신처인 작은 굴을 발견하고 굴 밖에 있던 사람들을 총살한 뒤 밖에서 불을 질러 질식사 시켰다. 희생자는 11명으로 이중에는 50대 여성과 9살 난 어린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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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랑쉬굴 다랑쉬굴 발굴 당시 처참한 현장 재현(제주 4.3평화기념관)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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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간 마을 불바다가 된 중산간 마을(제주 4.3평화기념관) ⓒ 이윤옥


미군과 군인, 경찰에 의한 무고한 민간인 학살을 기록한 사진은 그날의 비극을 무언으로 관람객에게 하소연 하고 있었다. 휠체어를 타고 기념관을 둘러보던 손승현(27)씨는 "한마디로 놀라웠다. 이런 비극의 현장을 국민이 잘 모르고 있어 안타깝다. 희생자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전시물을 열심히 보던 최강연(34)씨는 "고등학교시절 제주 4·3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관심을 갖고 있었다. 오랫동안 진상규명이 안 되다가 이만큼이나마 그 진상이 알려져 다행이다. 비극의 현장을 보니 가슴이 무척 아프다. 이런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길 바란다"고 밝혔다.

기억하라, 기억하라, 민간인 학살의 날을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은 전국에서 수많은 중고등학생들이 수학여행으로 이곳을 찾고 있지만 시간에 쫓겨 거의 건성으로 돌아보고 나가는 것이었다.
"저기 학생... 학생... 기념관을 둘러본 소감 좀 말해 줄래요?"라며 몇 명을 잡아 보았지만 "선생님이 얼른 돌아보고 버스 타랬어요"라는 말을 남기고 학생들은 총총히 사라졌다. 인솔 교사들은 이곳이 단순한 유적지가 아니라 제주 사람들의 억울한 희생을 기억해야 하는 곳임을 알게 지도해야 하는데 참으로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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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명비 제주 4.3사건 희생자 하나하나의 이름을 새긴 각명비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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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의 폭낭 관람객들이 관람한 뒤 소감과 소원을 쓴 "혜원의 폭낭" ⓒ 이윤옥


67년 전 평화의 섬 제주에서 있었던 4·3 사건의 비극을 기록한 전시관과 공원 중앙의 위령탑과 위령단을 둘러보는 기자의 마음은 매우 착잡했다. 그날 참상의 비극을 오늘의 우리가 다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제대로 된 역사적 사실만이라도 기억하고 끊임없이 해원굿을 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면서 봉개동 언덕을 내려왔다.

제주 4·3평화공원은 제주시 봉개동 산 237-2번지(새주소, 제주시 명림로 430)에 21만9031㎡(6만 6천여평) 부지에 4·3 평화기념관, 위령제단, 위령탑, 상징조형물들이 들어서 있다. 1980년대 말 4·3진상규명운동을 시작한 민간사회단체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1995년 8월 제주도에서 위령공원 조성계획을 수립하였고 김대중대통령 후보 시절 4·3특별법 제정을 통한 진상규명, 위령사업과 보상 공약이 이뤄져 2008년 3월 28일 개관하였다.

*제주 4·3 평화공원 사업소: 064-710-8461, 관람무료, 매월 1주,3주 월요일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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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비 내리는 봄날에 제주 4·3평화공원 안 제주 4·3 국가추념일 공식지정 기념 시화전 “꽃비 내리는 봄날에” 앞에선 기자 ⓒ 이윤옥


덧붙이는 글 한국문화신문 '얼레빗'에도 보냈습니다.
#4.3사건 #제주4.3사건기념관 #제주4.3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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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 시인.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한국외대 외국어연수평가원 교수, 일본 와세다대학 객원연구원, 국립국어원 국어순화위원,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냄 저서 《사쿠라 훈민정음》, 《오염된국어사전》,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집《서간도에 들꽃 피다 》전 10권, 《인물로 보는 여성독립운동사》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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