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두를 주문했더니 김칫국이 먼저... 뭔가 다르네

[기차 여행] 내포(內浦)의 중심 동네 홍성 여행

등록 2014.05.16 13:45수정 2014.05.16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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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차 (Train)는 여행 (Travel)과 잘 어울리는 사이다.
기차 (Train)는 여행 (Travel)과 잘 어울리는 사이다. 김종성

푸릇푸릇 초록으로 변해가는 들녘의 풍경을 바라보며 스치듯 지나가는 기차 여행은 봄날이 제격이다. 기차(Train)는 여행(Travel)과 절친한 관계다. 요즘엔 먹거리가 담긴 손수레가 사라진 대신 열차에 카페 칸이 생겨서 도시락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며 여유롭게 혹은 몽상에 푹 빠져 창밖을 응시하는 맛도 좋다. 창 너머 풍경이 너무 빨리 지나쳐 여행하는 맛이 덜한 KTX보다는 상대적으로 느릿느릿한 무궁화호가 봄날 기차여행에 더 어울리겠다.

충청남도 천안시에서 아산·예산·홍성·보령을 지나서 서천군 장항읍까지 달렸던 장항선 기차는 얼마 전부터 군산, 익산까지 이르는 긴 철도가 되었다. 예전에는 단선에 곡선 구간이 많은 느림보 철도로 낭만파와 효율파간의 호불호가 있었으나, 요즘은 직선의 형태로 철로작업을 하여 많이 빨라졌다고 한다. 항구 혹은 포구의 질펀한 갯내음이 느껴지는 이름의 장항선 기차를 타고 내포(內浦)의 중심 지역이었다는 충남 홍성에 갔다. 큰 오일장이 열리는 1일과 6일 날에 맞춰 홍성에 가면 더욱 좋겠다.


충청도만의 쿨함이 느껴지는 홍성 오일장

 호떡을 붕어빵처럼 만들어 내는 홍성 오일장터의 호떡집.
호떡을 붕어빵처럼 만들어 내는 홍성 오일장터의 호떡집. 김종성

두 시간 여 만에 도착한 장항선 홍성역, 유리와 철골 위주의 KTX 역사(驛舍)와는 달리 고풍스러운 역사의 아름다움에 벌써 느낌이 달랐다. 홍성역에 내려 오일장이 열리는 홍성시장으로 찾아갔다. 청산리 전투로 유명한 백야 김좌진 장군의 커다란 동상을 지나면 나타나는 홍성장(場)은 160년이나 된 오랜 전통의 시장이다. 예전엔 따로 열렸다는 동문장과 서문장이 합쳐져 매 1일과 6일날 풍성한 오일장터가 펼쳐지고 있었다.

오일장터는 어디나 시끌벅적하고 사람들로 북적이지만 홍성장은 다른 분위기가 배어 난다. 장터에서 흔히 들려오는 상인들의 적극적인 '호객행위'가 없다. 물건 값을 흥정하는 순간에도 서로간의 강한 '밀당'보다는 뭉근하고 점잖은 충청도 양반의 기질이 느껴져 재미있었다. 손님과 상인의 구분이 잘 안되는 오일장 분위기가 그냥 동네 주민들의 '정모' 같았다.

농산물은 물론 해산물도 풍성하게 펼쳐진 큰 장터를 구경하다 만두와 호떡을 파는 큰 포장마차에서 아침을 먹게 되었다. 재미있게도 만두나 호떡을 주문하면 이내 김치와 멸치를 넣고 끓인 얼큰한 김칫국이 먼저 나온다. 충청도가 고향인 내 어머니가 해주던 그대로의 맛이다. 내 표정을 봤는지 일하는 아주머니가 김칫국을 더 먹을 양이면 직접 퍼먹으면 된다며 구수한 충정도 사투리로 알려 주셨다. 기름을 두른 팬에 굽는 호떡을 붕어빵 만드는 기계처럼 생긴 쇠통에서 구워 내는 이채로운 풍경도 홍성장만의 특징이다.

 난생 처음 뻥튀기를 터뜨리는 아주머니를 만났다.
난생 처음 뻥튀기를 터뜨리는 아주머니를 만났다. 김종성

 여러 가지 반찬들을 낯모르는 손님들과 함께 하며 먹는 들깨 수제비.
여러 가지 반찬들을 낯모르는 손님들과 함께 하며 먹는 들깨 수제비. 김종성

선생님과 함께 오일장 구경을 나온 유치원의 아이들이 호떡을 먹으며 참새들처럼 재잘거리고, 늙은 노모와 아들이 나무 의자에 둘러 앉아 만두와 김칫국을 먹는 모습이 참 정다웠다. 아이들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귀여움을 받는 오일장의 스타가 되었다. 오일장터의 명물은 뻥튀기 장수도 빼놓을 수 없는데 홍성장에서 난생 처음 아주머니 뻥튀기 장수를 만났다. 능숙하게 뻥튀기 쇠통을 돌리더니 시간이 되자 구수한 흰 연기를 내뿜으며 쇠통을 큰소리 안나게 터트리는 모습이 능수능란하다.


인근 청양, 대천 등지의 오일장을 돌며 뻥튀기 장수를 한지 40년이 넘었단다. 가져온 곡물이 맛나게 튀겨지길 기다리는 아주머니들이 주거니 받거니 나누는 충정도 수다를 들어보는 것도 재미있다. 금방이라도 "괜찮아유~" 하며 최양락 아저씨가 나타날 것 같아 티 안나 게 슬금슬금 웃었다. 느긋함과 해학이 듬뿍 담긴 충청도 사투리하면 떠오르는 우스개가 생각났다. "당신은 개고기를 먹습니까?"를 충청도 말로 하면? "개 혀?" 란다.

3000원에 식당 아주머니 두 분이 쫄깃하게 내어주는 들깨 수제비를 먹고 있는데 명함을 나눠주며 새정치민주연합 후보자가 가게로 들어왔다. 6월에 있을 지방선거를 맞아 사람들이 많이 모인 오일장터에서 바쁘게 홍보를 하고 있었다.


타 지역에서 온 여행자는 이럴 때 후보자를 주시하는 게 아니라 앉아서 듣고 있는 동네 주민들의 모습과 표정에 자연스레 눈길이 갔다. 친근한 말이나 농담 한 번 없이 줄곧 진지하게 80만 출향군민과 함께 100만 군민경제시대를 열겠다며 짧은 연설을 하는 이 후보는 수제비와 기가 막히게 어우러지는 들깨만큼도 호응을 받지 못하는 듯싶었다.

시장 상인들이 한 번 가보라며 추천해 들린 곳 중의 하나가 시장통 안에 있는 아담하고 예쁜 카페 '문전성시'. 홍성군에서 지원하고 상인 연합회에서 운영하는 쉼터 같은 곳으로 작은 이동형 스크린으로 영화도 상영한다. 1000원에 제공하는 커피를 마시며 앉아 쉬고 있다가 일하는 분에게 홍성이라는 고장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듣고 배우게 되었다.

내포(內浦)의 중심, 홍주

 싱싱한 해산물전이 길고 다양하게 펼쳐지는 홍성 오일장.
싱싱한 해산물전이 길고 다양하게 펼쳐지는 홍성 오일장. 김종성

홍성군은 내포 문화권의 발흥지라고 한다. '내포(內浦) '란 바닷물이 육지로 깊숙이 들어와 큰 배가 드나들 수 있는 내륙지방을 뜻하는데, 서해바다에 면해 물산이 풍부했던 충남 서부지역을 가리키는 옛 지명이다. 홍성은 내포지역을 관할하는 홍주목 (홍주는 홍성의 옛 이름)이 설치되었던 곳으로 내포지역의 물산이 모이는 중심지였다. 어쩐지 홍성 오일장터에 해산물이 풍성했던 게 이유가 있었다.

1914년 일제 강점기 행정구역 개편 이전까지 홍성의 이름은 '홍주'였다. 홍주와 공주의 일본식 발음이 비슷해서 '홍주'를 '홍성'으로 바꿨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은 홍주 의병 등 그 어느 지역보다 항일의식이 높았던 지역의 특성을 희석시키고자 일제가 지명을 바꿨다는 이야기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고 한다. 홍주목은 당시 충청도 서부의 22개 군을 관할하였다. 행정의 중심지 구실을 하던 홍성은 자연스럽게 당시충청도 서부의 경제 중심지 역할을 함께 됐다.

조선후기 홍성에 있었던 보부상 단체였던 상무사는 지금의 홍성은 물론이고 청양, 광천까지를 그 활동영역으로 삼았다. 1830년대에 들어서 오일장으로 정착된 홍성읍내장이 당시의 서산장, 예산장, 청양장, 광천장을 아우르고 장세를 떨치게 되었던 것도 당연했다. 이에 매년 홍성에서는 충남 서해안 지역의 넉넉한 인심과 풍부한 먹거리를 접하고, 이 지역이 낳은 역사 속 위인들을 만날 수 있는 홍성내포문화축제를 펼쳐 보이고 있다.

홍주 의병의 역사가 담겨있는 홍주성 

 저항과 의병 투쟁의 역사가 담겨있는 홍주성.
저항과 의병 투쟁의 역사가 담겨있는 홍주성. 김종성

지금도 홍성군청에는 당시의 관아와 홍주성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하여 바로 찾아가 보았다. 조선시대의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홍주는 호서의 거읍(巨邑)이다. 그 땅이 기름지고 넓으며 그 백성이 번성하고 많아서 난치(어려울 難, 다스릴 治)의 고을로 일컬어졌다"라고 기록된 홍주엔 홍주성(洪州城)이 있다.

전국적으로 관아가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 흔치 않은데 홍성은 홍주성 안에 군청과 조선시대 관아가 함께하고 있는 독특한 곳이기도 하다. 원래 홍주성 안에는 관아건물만 35채나 있었다고 하며, 홍주목 관아 건물과 성곽 문루들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대부분 파괴되고 말았다.

수령이 약 650년이 넘었다는 '홍성 오관리 느티나무' 고목도 눈길을 끌었다. 오관리 느티나무 앞에 있는 안내문을 읽어보니 "홍주고을에 액운이 낄 것 같으면 느티나무가 밤을 새워 울었으며 이때마다 서둘러 예방을 하였다"고 한다. 지난 세월의 온갖 풍상을 다 겪어낸 나무의 갈라지고 주름진 모습을 보니 정말 그런 전설이 생길만했다.  

 수백살 느티나무들과 옛 관아, 홍성군청, 홍주성이 함께 모여있다.
수백살 느티나무들과 옛 관아, 홍성군청, 홍주성이 함께 모여있다. 김종성

성곽을 따라 걸어서 한 바퀴 돌아보기 좋은 홍주성(사적 제231호)은 풍수지리학적으로 천둥이 땅에 떨어지는 형세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지역에선 싸움이 많이 치러졌다. 열여섯 차례에 걸쳐 왜구들이 침입하였고 고려 중기의 문신 최향의 반란, 이몽학의 반란, 동학농민운동과 의병전쟁으로 일컬어지는 수많은 전란을 거치면서 1772미터였던 홍주성벽은 810미터만 남았다. 홍주성 앞에 자리한 입장료가 무료인 홍주성 역사관은 홍성의 역사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해주었다.

물줄기는 보통 북에서 남으로, 동에서 서로 흐르기 마련인데, 홍성을 가로지르는 삽교천은 남에서 북으로 흐른다. 이는 제 뜻을 굽히지 않는 절개를 의미한단다. 그래서 유독 충남 홍성에는 백야 김좌진 장군, 만해 한용운 선생, 매죽헌 성삼문 선생 등 나라를 지키거나 신하로서 충절을 다하기 위해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던 위인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홍주성 역사관에서 알게 된 '홍주 의사총(洪州 義士塚)'에도 가보았다.

1905년 일제의 강압에 의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에 항거하여 일어난 의병들이 홍주산성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900여 명이 전사를 하였다. 일제 강점기 동안 홍천강변에 유기 되었던 의병들의 유해를 1949년 나무를 심다가 우연히 발견하여 그 유해를 합장하여 모신 곳으로 홍성에 가면 꼭 들려볼 일이다.
덧붙이는 글 지난 4월 11일에 다녀 왔습니다.
#장항선 기차 #홍성 #홍성오일장 #홍주성 #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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