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재보험은 매정했습니다. 두 번의 사고로 한 손가락만 겨우 남아있게 된 노동자가 겪었을 충격, 가족의 슬픔을 어루만져 주지도 않았습니다.
노동건강연대
사회보험은 안전판이기도 하지만 소득재분배의 기능도 갖습니다. 그저 인정 기준만 엄격히 하고 수급자 기준만 따져서는 노동자가 빈민으로 밀려나는 일을 막아줄 수 없습니다. 일자리를 떠도는 비정규직, 알바, 영세공장, 특수고용직노동자, 영세자영업자들은 사고가 나거나 병에 걸리면 사회보험이 제 역할을 해주어야 사회적인 삶을 유지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산재보험은 문구로는 노동자의 책임없이 모든 사고에 적용된다고 하면서, 신청서를 쓰게 하고 사업주의 도장을 받아오게 합니다.
사업주가 누군지도 모르는 제조업 파견노동자들, 불법인지도 모르고 인력업체를 통해서 공장으로 가는 노동자들이 어디로 가서 도장을 받아올까요. 계약기간이 정해져 있는 노동자들, 재계약을 걱정하는 이들은 어디로 가서 사장 도장을 받아올까요.
이 같은 현실을 정부가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사회보장의 사회적 순기능 같은 것은 눈 딱 감고 외면한 채 기업의 금고를 지켜주는 보험회사처럼 굴고 있을 뿐입니다. 본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신 한아무개님은 이같은 경험을 나눔으로써 좀 더 나은 사회가 되길 바랐습니다.
아프게 살아온 날들을 타인에게 들려주는 것은 어느 자본가의 이웃돕기보다, 예술가의 재능기부보다 값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생으로부터 사회가 배우고 후배노동자들이 덜 힘들길 바라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다음은 두 번의 산재사고를 입은 한아무개님의 말을 받아적은 것입니다.
"고아원에서 자라 남의 집 머슬살이를 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도망쳐 나왔어요. 정비 공장에서 일하다가 완행타고 12시간 걸려 서울로 왔지요. 용산역에서 중국집 배달원 일을 구해서 장승백이에 정착했어요. 거기서 배달을 열심히 했어요. 일년 배달 일을 하니 어떤 양반이 영등포에서 개업한다고 스카우트 해서 갔어요. 그때가 81년이었어요. 영등포에서 일하다가 장승백이, 방배동, 여기저기 중국집, 한식 배달 일을 하다가 주방 그릇닦이를 시작했어요. 외식 전문이라 주말에는 1만 개 이상을 닦아요. 식당을 그만두고 세진정밀이라는 프레스공장에 들어갔어요. 3개월은 있어야 프레스기계를 주는데 내가 남들보다 한두 시간 일찍 나가서 일하고 그러니까 보름 만에 기계를 내줬어요. 혼자 프레스기계를 잡고 일당 3000원 받고 일했어요. 잔업 조금씩 하고 그러니 한 달에 10~15만 원 정도 벌었지요. 그때 프레스 업종은 일이 많았어요. 고급화가 덜 된 상태라 일이 어마어마했어요. 85년부터는 한 달에 잔업을 180시간 정도 했어요. 평상시는 새벽 2~3시에 끝나고 금토일은 무조건 철야.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아줌마, 나 손이 없어졌어"공장 수위실에서 쪽잠 자고 살았어요. 라면 하나씩 먹고. 일당이 5000원이었는데, 남들보다 더 받는 편이었어요. 담배값 빼고 다 저금해서 돈이 모이니까, 86년 말에 회사 앞 구로동에 보증금 50만 원에 월세 3만원씩 내기로 하고 처음 방을 얻었어요. 회사 친구 놈이 방이 없어 같이 살았는데, 87년에 물난리가 났어요. 잠을 안 자고 퍼냈지만 못 당하고 물이 차올라서 학교로 피신 가서 일주일을 살았어요. 거기서 못살겠다 싶어 대림동, 보증금 50만 원에 5만 원짜리 2층집으로 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