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회] 제 아무리 손님이라지만 무례한 자들이옵니다

[무협소설 무위도(無爲刀)][43회] 비룡표국(2)

등록 2014.05.08 09:26수정 2014.05.22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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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장 비룡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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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도 無爲刀 ⓒ 황인규


"소수 정예라면야 우리 상계(商契)로서는 부담이 훨씬 줄어드니 환영해야 할 일이죠."


포대화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현실적인 얘기로 돌아가야겠군요. 비룡표국이야 본래 무림에 뿌리를 둔 사문이니 수경대 조직에 적극 협조하리라 믿소만 정주 최대 상인계인 작천방의 입장이 어떠신지요?"

원개가 포대화상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상인계 역시 무림맹처럼 연합체인 만큼 저 혼자 단독으로 결정할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빠른 시일 내에 의견을 모으도록 하겠습니다."
"허허, 배 대인이 마음먹으면 작천방의 결정은 이미 끝난 것이라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 이 자리에서 배 대인의 의견이라도 듣고 싶소이다."

시윤이 걸걸한 목소리로 포대화상 배 대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
배 대인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한꺼번에 말문을 터뜨렸다.

"좋습니다. 수경대가 소수정예로 구성된다면 저희로서도 그리 부담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이번 일이 어느 세력과 연관되는지는 확실히 파악해야 저희 입장을 밝힐 수 있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 상인들로서는 가장 껄끄러운 게 관(官)입니다. 까놓고 얘기해서 관과 부딪치지만 않으면 저희로서는 무림맹에 어떤 지원이라도 하겠습니다."


좌중의 시선이 원개에게 향했다.

"음, 아직 정확히 밝힐 단계가 아닙니다. 본관이 전모를 다 아는 것도 아닐뿐더러 맹주님의 의사 또한 결정된 건 아닙니다. 다만 본관이 미리 앞서 풍문과 여론을 탐지하고자 강호에 출두한 것뿐입니다."

원개가 약간은 자신 없는 투로 말했다.

"이 자리는 본 비룡문에서 이루어진 만큼 주인된 도리로서 제가 입장 정리를 해도 될는지요. 작천방의 입장도 있고 하니 원 도장께서는 말을 돌리지 말고 직답을 부탁하오. 이번 사건은 관과 관련이 있는 것이오, 무관한 것이오?"

담곤이 은근하지만 단호하게 원개를 바라보며 물었다.

"…… 어느 정도 관이 개입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오."

원개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좌중은 일순 정적에 휩싸였다. 담곤이 배 대인을 쳐다보자, 그는 두터운 눈꺼풀만 위 아래로 껌벅거렸다. 말을 아꼈지만 보일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아니라고 답하는 게 보였다. 상인계 작천방은 빠지겠다는 결론이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마침내 담곤이 분위기를 바꾸려는 사뭇 호탕하게 목소릴 높였다.

"자, 무당의 원 도장, 화산의 시 대협, 두 분이 오랜만에 저희 비룡포국을 왕림해 주셨는데 본 장문인의 대접이 소홀한 것 같소이다. 천하의 일은 영웅 혼자서 해결할 수 없고, 강호의 일은 몇몇 호걸이 감당할 수 없는 법, 나머지 일일랑 시류에 맡기고 오늘은 이만 회포나 푸는 게 어떨까요."

담곤의 호방함에 배 대인이 맞장구친다.

"담 장문인의 말씀이 지당하옵니다. 두 분 도사님들께선 수행이 지나쳐 뭇 중생들이 사는 법을 잊을까 염려되옵니다. 이 좌석 이후의 자리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도사님들도 지금부터 관모(冠帽)의 끈을 풀어헤치기 바랍니다. 강호에 배 모의 배포가 보기보다는 작다는 소문이 퍼질까 두렵습니다. 와하하핫."

배대인의 웃음소리가 수헌당에 울려퍼졌다.

담곤이 뒷목을 쓰다듬으며 침상에서 내려와 영창을 보니 동이 트고도 한참이 지난 시각이다. 지난밤 향연의 뒤끝인 숙취가 뒷목에 묵지근하게 고여 있다. 도사들이랍시고 체면치레를 하고 술잔도 좀처럼 비우지 않은 탓에 작천방의 배설과 둘이서 주거니 받거니 했더니 종내 숙취만 쌓이고 말았다. 배 대인 아니 배설은 상인답게 노련하고 교활했다. 이틀 전 무당과 화산의 도사들이 표국 방문을 사전 통기해 올 때만 하더라도, 그들이 정주를 지나는 길에 잠시 들리려는 줄 알았다.

무림인들에게 숙박을 제공하는 것쯤이야 한때 문파를 이끌었던 경력이 있는 그로서는 예의이자 의무다. 담곤이 맞이하고 보니 그들은 무림맹에의 지원을 은근히 요청하였다. 표국이라면 적어도 겉으로는 어느 세력과 협조한다는 소문이 나서는 안 된다. 표물에는 눈이 없고, 표운(運送)에는 거절이 없고, 표사에게는 심장이 없다는 말이 있다. 표국의 일에는 눈 감고 귀 막고 입을 봉해야 하는 일이 많다는 의미다. 불편부당이야말로 표국이 응당 취해야 할 처세의 기본이다.

그는 적이 그렇다면, 하고 유력 상인계 작천방과 다리를 놓아 줄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자리를 마련한 것이 어제였다. 작천방의 배설 역시 만만찮았다. 그는 관의 눈치를 보고 살아야 하는 게 상인의 숙명이니만큼 관에서 개입하는 일이라면 나서고 싶어도 나설 수가 없다는 뜻을 밝혔다.

담곤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무림맹이라는, 명분도 실리도 없는 존재에 대해 그는 늘 부정적이었다. 강호라는 게 각 문파의 자율에 의해 경쟁할 건 경쟁하고, 협조할 건 협조하면서 자연스레 질서가 형성돼야 하는 것 아닌가. 굳이 연맹이니 협의체니 하면서 조직을 구성하는 순간 그것은 개별 문파가 아닌 조직 그 자체가 목표가 되고 만다. 종이 주인이 되며 얻어먹는 놈이 큰소리치는, 관계의 역전이 일어나고 본말이 전도되는 거꾸로 된 질서가 형성되는 것이다. 

담곤이 침상에 걸터앉아 잠시 생각에 잠겼는데,

"나으리, 기침하셨는지요?"
문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총관사(總管事) 금택영이다.

"들어오게."

담곤이 답하자 택영이 들어오고 그 뒤로 세숫물이 담긴 대야를 받쳐 들고 온 시비가 따라 들어왔다. 나이든 시비는 거실 탁자 위에 대야를 조심스레 놓고 한쪽 벽으로 물러섰다. 담곤은 하는 둥 마는 둥 소세를 마친 후 택영을 돌아보며 물었다.

"제융전에는 별 일이 없느냐?"
택영이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이며 답을 한다.

"실은 식전부터 손님들이 왔는데 국주님께서 몸이 불편하신 관계로 기침이 늦으시니 잠시 기다려 달라 했으나 긴한 일이라면서 굳이 깨워달라고 합니다."
"그래 어떤 손님인데 그러느냐, 제융전에서 처리해야 할 일은 아닌 모양이구나."

제융전은 표국의 일을 처리하는 사무소다. 따라서 웬만해선 집사 택영의 지휘 하에 일 처리가 이루어지곤 한다.

"그러하옵니다. 소인이 누구시냐고 물어도 답은 안하고, 국주님을 직접 뵈고 나서야 용무를 밝히겠답니다."

택영이 송구스럽다는 듯 허리를 굽히며 말한다.

비룡표국이 비록 연륜이 그리 깊다고 할 순 없지만 강호에서 욱일하는 기세가 제법 당찬데 아무런 배경도 없이 신분을 안 밝히는, 그런 경우 없는 짓을 하진 않을 것이다. 비룡표국이 어떤 곳인지를 알고 온 자라면 적어도 그런 뻣뻣함이 통하는 자일 거라고 담곤은 생각했다.

"그래? 예의를 갖춰서 수헌당으로 모시게. 내 빨리 갖춰 입고 나감세."

"나으리, 아직 조찬도 드시지 않았습니다. 제 아무리 손님이라지만 그렇게 무례한 자들을 위해 조찬을 거르실 것까지는……, 이왕 기다리는 거 좀더 기다리도록 제가 조치하겠습니다."

택영이 다급하게 말하자 담곤이 손을 저었다.

"괜찮네. 어제 과음한 탓에 마침 조찬 생각도 별로 없으니 괘념치 말게. 손님들이나 안내하게."

택영과 하녀가 조심스레 뒷걸음치며 거실을 나갔다. 

담곤이 의관을 정제한 후 수헌당 집무실에 앉자마자 문이 열리며 두 명의 건장한 사내가 택영의 안내 하에 들어왔다. 한 명은 고리눈에 눈빛이 날카롭고 다른 한 명은 덩치가 크면서도 단단한 인상이다. 고리눈보다 예닐곱 살 연하로 보였다.

"우리는 금의위에서 왔소이다. 주위를 물리쳐 주시기 바랍니다."
젊은 사내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소속을 밝히며 독대를 요청했다.

담곤이 택영을 돌아보자, 그는 조용히 물러서 방을 나갔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젊은 사내가 담곤을 향해 말했다.

"이 분은 금의위 정주지부의 장반교위이시고, 저는 금릉에서 온 영반교위 조복이라고 합니다."

"비룡표국을 책임진 담곤입니다."
담곤이 포권을 하자,

"풍천의라고 하오."
풍천의 역시 포권을 하며 답례를 했다.

"허허, 강호의 기물이나 운반해주고 구전이나 뜯어먹는 당 표국에, 금의위 높으신 분들께서 어인 일이신지요?"

담곤은 조금도 위축됨 없이 천연덕스럽게 말을 뱉었다.

"나라의 중차대한 공무로 왔소이다. 비룡표국에 협조를 요청하는 바이오."
풍천의가 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라일로 오신 공무라면 저희의 뼈가 으스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도와드려야죠. 그러나 제 아무리 금의위라도 지켜야할 절차와 예의라는 것이 있소이다. 도찰원의 첨도어사 나리도 당 표국을 대함에 있어서 이토록 경시하지는 않았소이다. 모든 것이 노부의 불찰 때문이겠지만 도찰원에다가도 이 사실을 아니 짚고 갈 순 없을 것이오."

담곤이 당차게 나오자 풍천의와 조복은 의외라는 듯 시선을 교차했다.

도찰원의 첨도어사(僉都御史)라면 정4품이다. 품계로 따지자면 육부(六部)의 시랑(侍郞: 차관)에도 못 미치지만 실질적으로 상서(尙書: 장관)도 견제하는 직책이다. 말하자면 정식 감찰기관인 도찰원의 첨도어사도 이렇게 무례하게 나오진 않았는데 너희가 아무리 금의위라 할지언정 이런 식의 막무가내로 나오는 건 묵과할 수 없다는 시위인 것이다.

도찰원에 항의가 들어간다면 금의위로서도 좋을 건 없다. 현 황상께서 등극하신 이후 도찰원의 위세는 날로 살아나고 있다. 그동안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전횡을 일삼았던 동창과 금의위를 견제하기 위해 도찰원에 점점 힘이 실리고 있는 형국이다. 동창, 금의위, 도찰원 이 세 감찰기관이 서로를 견제하면서 어느 한쪽으로 권력의 추가 쏠리는 걸 방지하겠다는 것이 현 황상 성화제의 복안이다.
덧붙이는 글 월, 목 연재합니다
지난 월요일((5일)은 연휴 관계로 휴재를 했습니다.
사전에 공지 드리지 못한 점 사과드립니다.
#무위도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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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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