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젊은 딸이 정신을 놓고 산다'며 한 걱정 하신 다음 삐죽 자란 마늘 싹을 자르기 시작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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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아버지를 모신 절에 다니러 갔다 오시던 친정엄마에게 영등포역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봉투에 약간의 용돈을 챙겨 손가방에 넣고 약속 장소에 나갔다.
카페에서 커피가 나오자마자 엄마는 절에서 받아온 부적을 건네며 올해 삼제가 든 남편과 아들의 배게 속에 꼭 넣으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마침 챙겨온 용돈이 생각이 나 손가방을 뒤지는데, 부스럭거리는 비닐 소리가 났다.
"이게 뭐지?"손에 잡힌 것을 꺼내니 단단히 묶인 검은색 비닐 봉투 안에 동글동글 한 것들이 만져졌다. 그제야 며칠 전 그렇게 찾던 마늘이 생각났다. 산 물건이 많아 마늘을 손가방 안에 넣어두고는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풀어보니 그새 삐죽이 싹이 자라 있었다.
엄마는 '젊은 딸이 정신을 놓고 산다'며 한 걱정 하신 다음 삐죽 자란 마늘 싹을 자르기 시작하셨다.
유난히 마늘을 좋아하시던 아버지열다섯, 열여섯 살 무렵의 나는 힘겨움의 연속이었다. 중학교에 다니며 서울로 돈 벌러 가신 엄마를 대신해 셋이나 되는 동생들을 돌보고 농사일도 했다. 게다가 까다로운 아버지 시중까지 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종갓집 종손이신 아버지는 할머니 나이 마흔에 본 귀한 십 2대 독자셨다. 한국 전쟁 통에도 매끼 쌀밥을 드셨다고 하니 얼마나 금이야 옥이야 하셨을지 안 봐도 알만했다. 그래서였나 아버지의 입맛은 유난히 까다로웠고, 세상의 모든 일이 본인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믿고 계신 것 같았다.
그런 반면 육체나 정신은 매우 약하셔서 힘든 일은 하지 못하셨고, 사람들의 유혹에도 쉽게 넘어가셨다. '종갓집 재산' 하면 그래도 고향에선 알아주는 규모였다는데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쯤에는 모두 어디를 가고 빚까지 지게 돼 결국 엄마는 아버지를 대신해 이모님이 사시는 서울로 돈을 벌러 떠나셨다. 어린 내게 동생들을 당부하시며 떠나시던 그 새벽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여자 목소리가 담장을 넘으면 집안이 망한다'고 아버지가 벌려 놓으신 일을 수습하시느라 힘드신 엄마의 푸념. 아버지는 매번 말도 안 되는 말씀으로 엄마를 억누르셨다. 그러셔 놓고는 아버지 대신 돈 벌러 떠나시는 엄마를 잡지는 않으셨다.
엄마가 안 계셔도 일 년 여섯 번의 제사와 명절차례는 꼬박꼬박 치러야 했다. 지금 같으면 어떻게 그 세월을 견뎠는지 엄두가 나지 않으나 열다섯 열여섯 살의 어린 나는 힘들어도 모두 해냈다.
그중에서도 제일 힘든 것은 까다로운 아버지의 입맛을 맞추는 일이었다. 아버진 마늘이 듬뿍 들어간 음식을 좋아하셨다. 생선도 구이보다는 조림을, 굴도 국이나 전보다는 다진 마늘 한 숟갈 넣은 물회를, 김치도 익은 것 보다는 마늘 잔뜩 넣은 겉절이를 주로 드셨다. 김치를 담더라도 가장 고소한 배추 속은 따로 떼어내 전체 김치에 넣을 마늘의 절반가량을 넣고 따로 담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걸 먹으라고 해왔느냐"라면서 밥그릇이 안마당에 던져지곤 했는데 그때의 공포는 어린 내가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이럴수가, 마늘을 놓고 내리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