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회] "잠시 대인 어른의 귀를 빌리겠습니다"

[무협소설 무위도(無爲刀)][46회] 잠입(2)

등록 2014.05.19 11:24수정 2014.05.19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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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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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도 無爲刀 ⓒ 황인규


배설은 명첩을 뒤집어 보았으나 아무런 다른 표식이 없었다. 그는 혁련지가 누군지 몰랐으나 명첩에 적힌 대로라면 소금을 중계하는 상인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방금 자신이 소금 사업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천지신명께서 어찌 알고 염업에 관계된 사람을 마침맞게 내게 보냈는고. 배설은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말했다.


"들라 이르라."

시비를 따라 들어온 사람은 의외로 젊은 여자였다. 크고 시원한 눈이 사교적으로 보이지만 갸름한 콧날과 야무진 입매가 한편으론 도도해보였다. 접근하긴 쉽지만 가까이하기엔 어려운 부류랄까. 상인 특유의 직관으로 사람을 파악한 배설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혁련지를 안내했다.

"어서오시오, 혁련 소저. 소주에서 오셨다면 신안상계와 관련이 있나요?"
"아네요. 저흰 동서계에 속합니다."
"동서계라면?"
"소주 토박이 동정상인이 주축이 돼 결성한 계(契)입니다."
"오, 노부의 과문을 용서해주시오. 동정상계라 했으면 진작 알았을 것을. 예로부터 장강의 수운은 소주와 항주의 상인들에게 맡기고, 황하의 수운은 정주와 개봉의 상인들에게 맡기라는 말이 있듯이, 하남과 소항의 상인들이 진짜 상인이 아니겠소. 하하하.

배설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넉살을 떨었다.

산서상인이니 신안상인이니 하는 자들은 명대에 이르러 급부상한 졸상(猝商)이지만 소항이나 하남의 상인이야말로 유서 깊은 적통 상인이 아니냐는 자찬이다.   


"감사합니다. 배 대인께서 곽부(郭芙) 어르신을 아시는지요?"
혁련지가 조심스런 어투로 말했다.

"곽 노야?"
배설이 의외라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반색을 했다.


"알다마다요. 그래, 그 분은 잘 계시오?"
"예, 건강하시옵니다."
"소저는 곽 노야와 어떤 관계시오?"
"네, 저의 선친과 의제(義弟)를 맺으신 분이십니다. 저는 그분을 곽 숙부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곽 노야와 노부는 신의로 맺어진 사이인데…… 어언 삼십년이 됐구료. 곽 노야의 질녀라면 나의 질녀라고도 할 수 있소이다. 그러니 편히 맘을 가지시오. 소저." 

배설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 졌다.

곽부는 혁련지의 부친 혁련수와 젊은 시절 서로 뜻이 통해 형제의 의를 맺었다. 신안상계 소속인 곽부는 휘주 인근의 상권을 장악하고 정주와 낙양, 멀리 장안까지 비단을 공급하는 거상으로 유명하다. 배설과는 비단 거래를 통해 만나게 되었는데 신용이 있고 통이 커서 그런지 거래에 맺힘이 없었다. 잔돈까지 따지는 좀스런 상인들과 달리 곽부의 시원스런 거래 관행은 하남은 물론 장안의 상인에게까지 알려졌다.  

"소저께서 어인 일로 우리 방에 왕림하셨는지요?"
"제가 알기론 정주에선 작천방만이 상계(商契)다운 상계라고 들었습니다."
"오, 과찬이오."
배설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다름이 아니오라, 어렵다면 어렵고 쉽다면 쉬운 부탁을 청하고자 합니다."
혁련지가 깍듯한 태도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래, 무슨 일이시오? 같은 상도에 몸담고 있는 의리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해결해 드리리라."
"비룡표국의 담 국주님과는 익히 아는 사이라고 들었습니다."
"정주에서 상업에 몸담은 사람치고 비룡표국에 의지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보면 되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작천방과도 적지 않은 거래가 있다오."
"그렇다면 담 국주님과 사적인 연락을 소녀가 부탁드려도 될는지요?"
"담 장문인과는 노부는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지만, 무슨 일인지 알고나 만남을 주선을 해야 하는 것 아니겠소."

배설이 노련하게 용건을 물었다.

"실은 담 장문인이 저의 사숙됩니다."
"사숙?"
"네, 상계가 아니라 무예로서의 사숙입니다."

배설이 의외인 표정을 짓자, 혁련지가 설명을 했다. 사부 모충연과 자신의 관계와 사부님이 괴한에게 피습을 당한 후 그의 유언에 의해 담곤을 찾아 왔으나, 관헌의 감시가 심해 만날 수가 없다고 고백했다.

"아니 되겠네."
얘기를 듣고난 배설이 단호하게 말했다.

"네? 배 대인께서는 담 사숙어른께 그저 통기만 해주시면 나머지는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혁련지가 변명조로 다급하게 말했다.

"소저의 사정을 듣고보니 모른 척하기에는 인정이 아니지만, 사실 내 입장으로서도 관과 부딪치는 일은 삼가고 싶다네. 게다가 그 관이라는 게 일반 관부가 아니라 금의위나 은화사라면 얘기가 더 더욱 달라지네."

배설의 말에 혁련지는 생각에 잠겼다. 군자는 표범처럼 본색을 변화시키고 소인은 오로지 얼굴색만 변해(君子豹變 小人革面) 궁함을 벗어난다더니, 제아무리 혁면(革面)이 상인의 처세라지만 포대화상처럼 생긴 배설이란 자가 꼭 그랬다. 곽 숙부의 말이 나올 때만 하더라도 자신의 질녀라도 된 양 너그럽더니 위험이 감지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색을 바꾸는 것이다.

"대저 상인의 도란 의(義)가 그 첫째요, 신(信)이 둘째이고, 이(利)가 마지막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대인께서 먼저 곽 숙부님과의 의리를 생각해주시고, 다음으로 담 사숙어른과의 신을 소중히 여기시고. 끝으로 작천방의 이를 따진다면, 저의 청(請)을 받아들여 주심이 마땅한 줄 압니다."

혁련지가 간곡하게 말했다.

"소저의 말에 어폐(語弊)가 있소. 상도(商道)에서의 의(義)란 거래 상대를 함부로 바꾸지 않는다는 것을 이르고, 신(信)이란 약조한 거래 조건을 끝까지 지키는 것을 말함이고, 이(利)란 앞의 두 가지가 충족되는 가운데 서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을 구하는 것인데, 소저는 상도를 사람 사이의 예도(禮道)로 착각하고 있구려."

배설이 능란하게 말대꾸 했다.

혁련지는 작천방에 들어오기 전 여러 가지 경우를 머릿속에 심어 놓았다. 흔쾌한 수락과 단호한 거절, 대개 이 둘 사이에서 어떤 결정이 내려지기 마련이다. 상인에게 극단적 선택을 없다. 협상의 여운을 남기고 거래의 여지를 보여주는 것이 상인의 속성이다. 명분보다는 이익으로 움직여라, 상인의 철칙이다. 주어야 받을 수 있다. 상도의 이치다. 그녀는 심중의 패를 꺼냈다.

"대인께서 상인의 도만 말씀하시니, 저도 그럼 상(商)의 범위 안에서 다시 청을 드리겠습니다."
"무엇이요?"
배설의 눈이 빛났다.

"작천방에서 소금 거래를 원하신다면 제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소주에서 동서계와 통하면 염업의 확장에 문제가 없을 겁니다."

배설은 잠자코 말이 없이 눈앞에 놓인 주판을 검지로 드르륵 드르륵 오르내렸다. 깊은 생각에 잠겼을 때 그의 버릇인 것 같았다.

"얼마나 보내 줄 수 있소. 산서나 신안상계보다 가격을 낮춰 줄 수 있겠소."
배설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대인께서 원하시는 물량만큼 보내드리겠습니다. 거기다 신안상계보다 오푼 이상 싸게 공급해드리겠습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소? 소저."
"네, 저에게는 업보다 사부님의 유언이 소중합니다."
"상인이 강호의 일에 끼어드는 건 이롭지 못하오."
"저는 상인에 앞서 무예인입니다."
혁련지의 딱 부러지는 답에 배설은 딱히 할 말이 없는 듯 시선을 허공에 두었다.

이윽고 배설이 서안에서 종이를 꺼냈다.
"문서로서 약조를 함과 동시에 수결을 남길 수 있겠소?"
"당연하죠. 저희 상계의 어음까지 발행하겠습니다."
"좋소."
배설이 연적과 붓을 꺼내 문서를 적기 시작했다.

"대저 상인은 이(利)를 좇지 의(義)나 충(忠)을 좇지 않는다오. 이것이 태곳적부터 내려오던 상인들만의 도(道)라오. 유자(儒者)의 의(義)가 우리에게는 이(利)요, 선비의 충(忠)이 우리에게는 익(益)이라오. 혁련 소저와 노부 사이에선 주고받는 상인의 거래가 있을 뿐, 의와 충은 이가 보장 될 때만 빛나는 것 아니겠소."

배설이 문서를 적으면서 혼잣말 하듯 말했다.

"사대부가 그토록 매달리는 의와 충 또한 시대가 처한 입장에 다를 뿐입니다. 그들이 입만 열면 의니 충이니 하는 게 서로 모순되고 배척되는 상황에선 자신들의 입장에 따라 달리 해석하곤 했습니다. 유구한 흥망의 세월 속에서, 멀리 오호(五胡)의 오랑캐 나라에서부터 가까이는 원(元)의 지배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충은 왕조에 대한 충성였고, 의는 권세를 향한 의리였을 뿐입니다. 한편 상도는 권도를 따르지 않고 한결 같습니다. 어찌 불충이요, 불의라 할 수 있겠습니까."

혁련지의 명쾌한 답에 배설은 놀리던 붓을 잠시 멈추며 그녀를 한번 쳐다보았다. 

"그런데, 소저는 담 장문인을 뵙기 위한 복안이 있소?"
"은화사나 금의위의 기찰 하에 있다면, 통상의 절차로 만나는 건 위험을 자초하는 것일 터이니 달리 방법을 궁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소. 그 와중에 노부가 할 일이 무엇이겠소."
"담 사숙님을 작천방에 초청해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은화사에서 주시하고 있다면 담 장문인의 행적을 당연히 주목할 것이니, 그건 별로 좋은 방안이 아닌 것 같구려, 소저."
"우리가 찾아갈 수 없다면 사숙 어른을 우리에게 오시게 하는 방법도 있지 않습니까."
"달리 생각해 놓은 방도라도……?"

배설이 성마르게 물었다.
"무례를 용서해주신다면, 대인 어른의 귀를 잠시 빌리겠습니다."

혁련지가 책상 위로 상체를 숙이자 배설도 상체를 숙이고는 손을 들어 귀를 모았다. 배설의 귀와 한 뼘 가량 떨어진 혁련지의 입술이 바쁘게 움직였다.

다 듣고 난 배설이 손바닥으로 무릎을 탁 쳤다.
"소저의 지혜가 자방과 공명을 뺨치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대인."

혁련지가 쑥스럽게 답했다.
덧붙이는 글 월, 목 연재합니다
#무위도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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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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