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사진에세이 <다른 길> 겉 표지
느린걸음
100만부가 발간된 시집 <노동의 새벽> 그리고 옥중 에세이 <사람만이 희망이다> 등으로 잘 알려진 박노해 시인의 신간입니다. 오십을 바라보는 저는 동시대를 살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만, 젊은 독자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박노해 시인은 1989년 사노맹 결성을 주도하여 공개적인 사회주의 혁명 운동을 하였고, 7년여의 수배 끝에 1991년 체포되어 참혹한 고문 후 사형이 구형되고 무기징역에 처해졌습니다. 1998년 7년 6개월의 수감 생활 후 석방되었고, 2000년부터 생명 평화 나눔을 기치로 하는 사회운동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2003년 이라크 전쟁 현장에 뛰어든 것을 계기로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 중남미 등 가난과 분쟁의 현장을 찾아가며 평활동을 이어왔다고 합니다. 박노해 시인의 신작 <다른길>은 티베트에서 인디아까지 오지에 가까운 아시아 농촌 마을을 카메라에 담은 사진에세이입니다.
박노해 시인은 아시아 구석구석 산간벽지 마을에서 손수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의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들이야말로 이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지구인류 시대의 진정한 삶의 전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털어놓습니다.
"자신이 무슨 위대한 일을 하는지 의식하지도 않고 인정받으려 하지도 않고, 인류를 먹여 살릴 한 뼘의 대지를 늘려가고자 오늘도 가파른 땅을 일구어가는 개척자들. 인간이기에 어찌할 수 없음의 주어진 한계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인간으로서 어찌할 수 있음의 가능성에 최선을 다해 분투하면서, 우리 삶은 이만하면 넉넉하다며 감사와 우애로 서로 기대어 사는 사람들. 역사에 기록되지 않고 마치 한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들처럼 잊혀지고 무시되고 있지만, 이들이야말로 그 누구보다 이 세상 깊숙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본문 중에서)오늘 날 소위 문명세계에 사는 사람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지구 역사이래 생겨난 가장 풍요롭고 편리한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지만, 정작 영혼이 풍요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은 아시아 오지 마을을 지키며 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른바 문명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자급자족의 '인간 능력'을 잃고 모든 걸 돈으로 살 수 밖에 없는 무력해진 삶을 살고 있지만, 아시아 산간벽지에 사는 사람들은 여전히 '인간능력'을 잃어버리지 않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박노해 시인은 그들에게서 "내 안에 처음부터 있었지만 어느 순간 잃어버린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영혼이 풍요로운 땅, 아시아 오지 마을시인이 아시아 여행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화산이 있는 불의 땅 인도네시아에서 시작됩니다. 그는 인도네시아를 화산으로 생긴 비옥한 대지, 열대삼림이 숨쉬는 아시아의 허파, 1만 8천여 섬들이 별처럼 수놓아진 나라로 표현합니다.
그곳 화산마을에서 만난 농부들에게 들었던 삶에서 얻은 지혜가 담긴 이야기들을 독자들에게 전해 줍니다. 자신이 힘든 노동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도 아이가 자라서 농부가 되기를 바라는 부모,
"아이가 자라서 라당의 농부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밭을 밟고 오르며 농사짓는 건 몸이 좀 힘들 뿐이지만 남을 밟고 오르는 괴로움을 안고 살아갈 수는 없지요. 늘 마음의 평화를 누리며 살았으면 좋겠어요." (본문 중에서)우리나라농부들 중에 아이가 자라서 농부가 되기를 바라는 부모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요? 노동을 통해 마음의 평화를 얻는 사람들이 아니면 깨닫기 어려운 삶의 지혜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아울러 시인은 그야말로 노동이 신성한 곳에서 신성한 노동이 빚어낸 참된 아름다움을 발견합니다.
"기계가 아닌 물소와 사람의 손으로만 비탈을 깎고 찰흙을 다져 층층이 백 수십 겹의 계단논을 창조해냈다. 그 어느 신전보다 위대하고 아름다운 건축물, 후손에게 물려주는 최고의 문화유산이 아닌가."(본문 중에서)이 문장을 읽으면서 인도네시아 산간 화산 마을에 촘촘히 계간한 계단식 논이야말로 인류가 만들어 낸 최고의 건축 유산이라는 시인의 통찰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인은 아시아의 오지에서 삶을 이어가는 이들을 일컬어 '세계의 토박이'라고 표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