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인류학에 입문하고자 한다면...

[김성호의 독서만세⑧]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

등록 2014.05.26 11:05수정 2020.12.25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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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 일조각에서 나온 증보판 표지 ⓒ 일조각

세계 방방곡곡의 여러 문화, 다양한 종족의 삶과 문화를 소개하는 인류학 논문 19편이 실린 문화인류학 입문서적이다. 밀림의 원시부족부터 도시에서 생활하는 현대인의 삶에 이르기까지 그 문화적 특성과 기원을 추적하는 논문들이 흥미를 유발한다.

작자는 소외된 지역의 풍습과 생활양식, 전통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 인류학을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공간의 인간과 문화, 그리고 사회를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독자들에게 재인식시키고자 한다. 특히 후반부에 이르러 총체적인 문제에 직면해있는 인류학을 새로운 논의의 장으로 이끌기 위한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함도 느껴진다.


책에는 여러 사례를 적은 글이 다양하게 등장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티브족, 셰익스피어를 만나다'라는 글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인류학자 로라 보하난이 서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 사는 티브(Tiv)족과 생활하며 겪은 일을 적은 것으로 전혀 다른 문화 간의 만남에서 생기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다룬 글이다.

어느 날 그녀는 티브족의 추장과 장로들이 모인 자리에서 <햄릿>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를 얻는다. 이 자리에서 그녀는 자신이 아는 햄릿에 대해 말하지만 티브족에게 받아들여진 <햄릿>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것이 아니다. 티브족은 <햄릿>을 자신들의 잣대를 통해 재단하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형의 아내를 취한 왕의 행위를 당연하게 여기는 티브족 장로들의 태도는 보하난을 당황하게 한다. 그러나 이는 티브족이 아니더라도 서아시아나 몽고처럼 전쟁이 잦거나 삶이 거칠어 여자가 적은 문화권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풍습이다. 물론 원작자인 셰익스피어는 형수를 취한 왕의 행동을 그릇되었다고 보았고 독자들이 극중 햄릿과 마찬가지로 왕의 행위에 분노하기를 원했을 테지만 말이다.

티브족 사람들은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하는 햄릿에 대해 그가 삼촌과 동년배가 아니므로 옳지 못한 행위를 했다고 주장한다. 작은 씨족사회를 이루고 사는 티브족 사람들에게 있어 마을의 어른들은 곧 친족의 어른들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런 사고가 가능했던 것이다. 햄릿과 오필리어가 같은 마을 출신이므로 결혼해선 안 된다고 주장하는 장로들의 말 역시 같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씨족사회를 넘어선 곳에서, 예를 들자면 고대 그리스의 사회 등에서 부정한 삼촌에 대한 복수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스 신화 중 오레스테스의 이야기는 이에 대해 잘 그리고 있다. 그리스의 명예헌장에는 모든 것에 우선하여 아버지의 죽음에 복수할 의무가 규정되어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미케네의 왕이었던 아가멤논은 트로이를 함락시킨 후 딸을 죽였다는 이유로 아내 클라임네스투라에 의해 살해된다. 이에 명예헌장의 최우선 조항과 근친살해의 죄 사이에서 갈등하던 오레스테스는 마침내 자신의 어머니를 살해하여 아버지의 복수를 한다.


고대 그리스 뿐 아니라 다른 여러 문화권에서도 아들이 아버지의 복수를 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티브족 사회는 마을사람들 대부분이 아버지와 형제거나 친척인 꼴이어서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대드는 것은 매우 옳지 못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독특한 티브족의 문화이기에 다른 사회의 시각으로는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축적한 양식을 문화라고 보았을 때, 티브족의 문화가 타문화와 이렇게 다르다는 것은 그 사회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영국의 문화는 제국주의를 통해 대부분의 국가들에 수출되었고 그 결과로 우리는 셰익스피어를 비교적 편하게 읽을 수 있다. 그러나 티브족이 사는 사회가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영국과 다르다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셰익스피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재미있게 느껴지는 이유일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대개의 민족지들은 내게 흥미와 감탄을 안겨주었지만 몇몇 민족지를 읽으며 마음속에서 문화상대주의의 절대적 적용례들에 대해 얼마간의 거부감도 일었다. 상대성이라는 것이 우리와 다른 모두에게 비판의 여지를 제거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문화인류학이 갖고 있는 상대성의 잣대란 매우 엄격히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덧붙이는 글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한국문화인류학회 엮음, 일조각 펴냄, 2006년 8월, 398쪽, 13000원)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 - 개정증보판

한국문화인류학회 엮음,
일조각, 2006


#한국문화인류학회 #일조각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 #티브족 #셰익스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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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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