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가는 풀뿌리민주주의, 이렇게 살려볼까요

[서평] 하승우의 <풀뿌리민주주의와 아나키즘>

등록 2014.06.06 10:57수정 2014.06.06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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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선거였다. 지역 일꾼을 뽑아야 하는 선거였다. 지방정부 수장과 그를 견제할 의원들이 주인공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전혀 다른 인물이 선거 전면에 부각되었다. 중앙 정치의 절대적인 상징인 대통령이 전면에 나선 것이다. 무엇보다 거대 양당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인 정치 구도 탓이 컸다. 그렇더라도 "대통령의 눈물을 닦아달라"니. 지방선거를 달군 구호치고는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돌이켜보면 정도는 달랐지만 기존의 지방선거가 대개 그랬다. 여야의 중앙당을 정점으로 한 정치 피라미드 구조 속에서 선거가 치러졌다. 이번 선거 국면에서 여야가 기초공천제 폐지를 놓고 격렬하게 대립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지역에 밀착되어 있어야 할 풀뿌리 일꾼들이 지방선거를 중앙 정치 무대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쯤으로 여기기 일쑤였다. 거꾸로 이른바 중앙 정치인들이 지역의 정치 일꾼으로 들어서는 경우도 있었다. 지역에 헌신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여야 중앙 정치의 지역 내 역학 구도를 공고히 하려는 전략의 일환인 경우가 많았다.

이번 6·4 선거는 여섯 번째로 치러진 지방선거였다. 햇수로 20년이 흘렀다. 적지 않은 시간이다. 그사이 대한민국의 풀뿌리 민주주의는 얼마나 성장했을까. 지역정치 특유의 고유한 정체성과 특장점을 시민들에게 얼마나 각인시켰을까. 이번 선거에서도 확인됐듯이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기가 어렵다. 지역정치, 넓은 의미의 풀뿌리민주주의가 우리에게는 여전히 지나친 욕심일까.

<풀뿌리 민주주의와 아나키즘>에서 저자 하승우는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풀뿌리민주주의의 방향을 제시한다. 저자가 눈여겨보는 지점은 '완전을 거부하는 사상'인 아나키즘이다. 저자는 풀뿌리민주주의와 아나키즘의 이론과 역사, 현실을 짚어보면서 주체의 성찰, 정치 행동, 살림살이 정치의 재구성 등을 강조한다. 연방주의와 협동운동 등 구체적인 실천 방략도 꼼꼼하게 짚어준다.

저자의 관점을 빌려 보자면, 풀뿌리민주주의는 중앙 정치에 대비되는 지역정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직접·참여민주주의나, 그런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규모의 민주주의'와도 같지 않다. 저자는 풀뿌리민주주의를, 민주주의를 그 근본에서 되짚어보려는 노력으로, 또한 좌와 우라는 이념 스펙트럼을 뛰어넘는 개념으로 규정한다.

그래서 저자는 자본주의 사회의 '1원 1표'의 민주주의나 사회주의 사회의 '1인 1표' 민주주의 등에 내포된 기계적인 합리성, 형식화하고 이름뿐인 민주주의에 모두 반대한다. 형식화한 대의민주주의나 관료화·중앙집권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풀뿌리민주주의는 단순히 아래에서 시작해 변화의 씨앗을 만들자는 '운동의 전략'이 아니다. 오히려 풀뿌리민주주의는 우리의 삶이 단단하게 이 땅에 뿌리를 내려서 권력이 우리를 밀어내고 갈아엎으려 해도 잡초처럼 끈질기에 버텨보자는, 그리고 서로 뿌리를 단단히 얽어서 함께 살아보자는 '생활의 전략'이다. 운동의 가치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야 하지만, 그 가치가 생활로 단단히 묶이지 않으면, 따라서 운동의 가치와 삶이 단단히 서로 부둥켜안고 받쳐주지 않으면 변화는 지속되기 어렵다. 풀뿌리민주주의는 변화의 과정이면서 그것 자체가 변화의 목표다. (16쪽)

요컨대 저자는 풀뿌리민주주의가 지향하는 가치가 자기 의식을 되찾은 시민이 스스로 세상을 바꾸는 데 있다고 본다. 이를 위해 저자는 정치적으로 소외된 시민이 정치 주체로 성장해 공동체를 이끄는 일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각각의 시민이 가진 정치적 가능성과 잠재성을 인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일방적인 선동보다 지속적인 대화와 상호 이해를 지향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를 위해 저자가 주목하는 사상이 바로 아나키즘이다. 아나키즘은 흔히 '무정부주의'라는 부정적인(?) 말로 번역된다. 그런데 이 번역에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저자에 따르면, 아나키즘의 어원은 '지배자가 없다'는 뜻의 그리스어 'anarchos'다. 이 말을 처음 전해 준 일본에서는 '무정부주의'보다 '무강권주의'가 더 적절한 번역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고 한다. 아나키즘에 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사실 아나키즘의 주장은 '무질서'나 '무정부'로 끝나지 않는다. 그 이면에는 빼앗긴 자기 결정권을 되찾으려는 욕구, 자율적 질서를 향한 욕구가 도사리고 있다. 아나키즘은 모든 권력에 맞선 반대, 모든 조직에 맞선 반대, 모든 질서에 맞선 반대가 아니라, 제어할 수 없고 집중화된 권력을 향한 비판이다. 따라서 '반강권주의(反强權主義)'가 적절한 번역이다. (157쪽)

저자는 '반강권주의'로서의 아나키즘이 거대화한 권력을 잘게 나눠야 한다는 식의 독특한 권력관을 가진다고 분석한다. 탈중앙화와 분권이 그것이다. 권력은 크게 뭉칠수록 통제에서 벗어나고 그 영향을 받는 개인을 소외시킨다는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탈중앙화와 분권만으로는 현실의 불평등을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본다. 저자가 이런 아나키즘의 현실적인 대안으로 연방주의를 내세우는 배경이다. 저자에 의하면 연방주의는 국가와 자본이 개인의 정보를 마음대로 관리하고 이용하지 못하도록 맞서는 것뿐 아니라 그 권력을 작고 자율적인 공동체 단위로 분할하고 각자의 자유를 위해 지원하며 필요한 사안에 따라 연대하는 체제를 가리킨다.

풀뿌리민주주의를 위한 실천 방략인 연방주의든 협동운동이든 그 밑바탕에는 아나키즘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저자에 따르면 아나키즘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하나의 태도다. 아나키즘의 정치적 주체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새로운 정치를 시작하려는 배제된 사람들이다. 아나키즘의 주체가 특정한 계급이나 계층으로 제한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실에서 아나키즘은 테러와 폭력의 사상으로 덧칠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사회 분위기와 다르게 아나키즘이 생명과 평화를 존중한다고 말한다. 미래의 부나 권력을 위해 지금 현재의 행복을 저당 잡히지 않는 사랑, 소유하지 않고 더불어 함께 누리려는 사랑이 아나키즘이라고 정의한다. 저자가 인용하는 한 구절 중에 나오는 톨스토이의 인상적인 말을 들어보자.

다른 어떤 사회 이론보다도 아나키즘은 인간 생명을 그 무엇보다 귀중히 여긴다. 모든 아나키스트들은 근본적으로 톨스토이의 정신에 동의한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주장했다. 어떤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인간 생명을 희생하게 된다면 그 상품 없이 사회가 유지되도록 해야 한다. 생명이 없는 사회는 있을 수 없다. 그렇다고 아나키즘이 순종을 가르치는 건 절대 아니다. 모든 고통과 비참함과 병폐가 순종이라는 악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을 알고 있는데 어떻게 순종을 가르칠 수 있겠는가? (260쪽)

그래서 아나키즘은 '직접행동'을 강조한다. 저자는 직접행동을,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조건들에 능동적으로 개입하고 교감하며 '나'와 '우리'를 성장시키는 과정으로 규정한다. 그 직접행동이 던지는 물음은 단순하다. 나는 내 삶의 주인인가, 나는 내가 믿는 것을 실천하며 존엄하게 살고 있는가 등이 그것이다.

저자는 풀뿌리민주주의를 민주주의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다시 시민의 지위를 보장하려는 노력으로 보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나키즘에서 강조하는 직접행동은 자기 삶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다시 주인으로 서기를 바란다. 그것은 정치 공간과 공장과 사무실, 학교, 가정 등 모든 공간을 막론한다.

내가 세상 모든 일에 개입할 수는 없다. 그래서 직접 해야 한다는 당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실제로 그런 힘을 가지고 태어나고 살아간다는 강한 '믿음'과 그렇게 산다는 '존엄'이다. (263쪽)

저자는 책의 결론에서 아나키즘의 정신에 바탕을 둔 연방주의와 협동운동 등을 풀뿌리민주주의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략으로 제시한다. 풀뿌리민주주의와 아나키즘이 분권과 연방주의, 사적 소유와 노예 노동에서 벗어난 살림살이, 서로 돕고 보살피는 인간 본성 등의 측면에서 본질적인 속성을 공유할 수 있는 이유에서다.

저자는 풀뿌리민주주의와 아나키즘의 결합이 현실적으로도 그 의의나 가치가 적지 않다고 주장한다. 풀뿌리민주주의는 지역화하면서 대안적인 이념의 성격을 잃어가는 현실을 다잡고 다시 근본적인 사회 변화의 대안으로 자신을 제안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 아나키즘은 대중운동을 만날 접촉면을 잃은 채 담론으로만 논의되는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이번 지방선거의 투표율은 56.8퍼센트였다. 100명 중 44명 정도가 투표를 하지 않은 셈이다. 어떤 이유와 사정들이 있었을까. 한두 가지로 설명하기 힘들 것이다. 확실한 것은 있다. 지금 이대로 계속 간다면 정치 체제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면서 우리의 민주주의 자체가 폭삭 주저앉을 수 있다는 점이다.

공공 영역의 사유화가 계속되고 무한 경쟁과 승자 독식 문화가 확산되면서 공포와 안전이 중요한 열쇳말이 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옛 것은 사라지고 있는데 아직 새로운 것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상황, 그렇다, 위기다.

이번에 투표를 하지 않은 44퍼센트의 사람들은 대한민국을 포기했을까. 그들은 자신이 사는 지역에 대한 관심의 끈을 완전히 끊어버린 것일까. 그렇지 않으리라. 그들의 기권을, 현재 체제에서는 어떤 희망도 찾을 수 없으므로 '나는 거부한다'는 식으로 적극적으로 해석할 수는 없을까. 그들을, 지금 이대로 살 수는 없다며 다른 길을 걸으려는 사람들로 볼 수는 없을까. 새로운 세상, 새로운 정치를 꿈꾸는 이들이 그 44퍼센트의 사람들에게 눈길을 돌려보았으면 하고 바라는 이유다. 이 책이 그 과정에서 훌륭한 길라잡이가 되길 기대해 본다.

<풀뿌리민주주의와 아나키즘>(하승우 지음 / 이매진 / 2014. 4. 30. / 296쪽 / 14,000원)
덧붙이는 글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풀뿌리민주주의와 아나키즘 - 삶의 정치 그리고 살림살이의 재구성을 향해

하승우 지음,
이매진, 2014


#<풀뿌리민주주의와 아나키즘> #하승우 #이매진 #6.4 지방선거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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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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