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의 제1차 경고문을 톱기사로 실은 1919년 4월 5일자 <매일신보>. 이 기사의 오른쪽에는 이완용의 경고문을 소개하는 편집자의 말이 실려 있다. 그래서 이 기사는 톱기사였다.
조선총독부
뒤이어, 이완용은 자신이 글을 쓴 동기를 설명했다. "조선독립이라는 선동이 허언이고 망동이라는 점에 대한 각계 인사들의 천 마디 만 마디가 부족함이 없는데도 (일반 대중이) 계속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나서게 되었노라고 그는 말했다.
그런 뒤에, 3·1운동의 본질을 이렇게 해석했다. "처음에 무지하고 몰지각한 아이들이 망동을 벌이더니, 그 뒤 각 지방에서 뜬소문을 듣고 함께 일어나 치안을 방해하고 있다." 무지몽매한 학생들의 망동에 어른들이 부화뇌동하는 바람에 이런 사태가 생겼다는 것이다.
'이완용의 제1차 경고문'이라 불린 이 기사의 결론은 "동포여! 내 말을 듣고 앞으로는 후회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에 이완용은 "백작 이완용, 삼가 고하다"라는 표현으로 경고문을 끝맺었다. '경고문'이란 제목과 '삼가 고하다'라는 끝맺음이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이완용, 3차 경고문에 모든 친일철학 동원제1차 경고문이 나가자, 한국인들 사이에서 분노와 비판이 터져 나왔다. <매일신보>에 소개된 바에 따르면, 어떤 사람은 "매국노의 말이 세상의 이목을 더럽힌다"라며 울분을 표시했다. 이완용도 이런 반응을 확인했다. 그래서 그는 4일 뒤인 4월 9일 제2차 경고문을 발표한다. 제1차 경고문에 대한 대중의 반응을 보고 뭔가 울컥했던 것 같다.
4월 9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제2차 경고문에서, 이완용은 자기의 진심을 믿어달라고 말한 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한다. 여러분이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위협에도 개의치 않고 경고문을 다시 발표한다"고 말했다. 대중의 비판에 대해 다소 조롱 섞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이 경고문에서 이완용은 자기가 소신을 갖고 제1차 경고문을 작성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 외에는 특별히 추가된 내용이 없다. 제1차 경고문에 대한 대중의 반응 때문에 심기가 좀 불편했는지, 이완용은 "백작 이완용, 다시 고하다"라는 말로 끝맺음을 했다. '삼가 고하다'가 '다시 고하다'로 바뀐 것이다.
3월 1일 시작된 만세 시위는 4월에도 계속 확산되다가, 5월 하순이 되면서 약해지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이완용은 제3차 경고문을 발표할 필요성을 느꼈다. 시위가 약해지는 시점에서 쐐기를 박아야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5월 29일 제3차 경고문을 발표한다.
확실하게 쐐기를 박기 위해서인지, 이완용은 <매일신보>에 실린 제3차 경고문에서 자기의 모든 철학을 총동원했다. 모든 철학이란 것은 친일 철학을 말한다. 모든 철학이 다 동원되어서인지, 제3차 경고문은 앞의 두 개에 비해 내용이 훨씬 더 길다.
"일한합병은... 조선민족의 유일한 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