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란수 명창 20대 모습
조종안
"지금은 국악원이라고들 하는데, 옛날에는 '성학교'라고 했어요. 성학교, 권번 그렇게 두 가지로 불렀제. 초등학교는 6학년 졸업도 못 해 부럿소. 예, 안가불고 도시락만 까먹고, 마루에 앉아서 보고 배우고, 그래가지고 학교를 워낙 많이 빠지고 안가니까 학교에서 우리 집으로 조사가 나왔어. 애기가 순전 안 오고 그러니 이게 웬일이냐고... 그래갖고 탄로가 났어··".(최란수 구술 대담집 12쪽)
전후 사정을 알게 된 아버지는 노발대발, "화냥년 되야서 최씨 집안 망칠라고 그러느냐!"며 온갖 욕설과 매질을 해댔다. 그래도 어머니는 "사주팔자를 그렇게 타고났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말렸다.
13세 때 전주국악원 이기권 원장 집(익산)으로 가출한 최란수는 어머니의 적극적인 보살핌으로 첫 스승인 이기권 명창을 집으로 모셔 <춘향가>, <흥보가>, <심청가> 등을 배웠다. 20세에 득음과 명창의 꿈을 품고 상경하여 박초월(1917~1983) 선생을 평생 스승이자 어머니처럼 모시면서 동편제 판소리를 익혔다.
동편제는 판소리 전승 지역의 특징에 따라 구분한 것으로 구례·운봉·순창·흥덕 등 전라도 동부지역에서 전승된 소리를 일컫는다. 서편제가 섬세한 기교의 비애가 섞인 계면조 구조를 이루는 데 반하여 동편제는 웅장하면서 호탕한 소리와 무거운 발성, 서편제보다 음을 높게 들어내는 발성이 특징으로 전해진다.
어려운 여건과 경제적 궁핍 속에서도 오직 명창이 되겠다는 굳은 의지로 득음을 위한 고행의 길을 걸었던 최 명창은 수없이 많은 자기극복의 시간을 감내하였다. 또한, 강도원 명창을 찾아가 스승으로 모시면서 배움의 길을 멈추지 않았다. 이러한 고통이 있었기에 그 스스로 "명창은 타고난 재능과 인내력, 그리고 고집이 있어야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스승으로, 아내로, 여인으로 그리고 소리꾼으로 치열한 삶을 살아오며 판소리를 하는 사람과 들을 줄 아는 사람을 많이 늘리는 일이 자신의 소명이라 생각한 최 명창은 1978년 전북 군산국악원 강사로 초빙되어 후학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군산과 인연을 맺는다. 아래는 사단법인 금강문화예술원 김갑식(71) 원장의 회고.
"정읍국악원 강사로 있던 최란수 명창을 두완수 국악협회 군산지부장(군산국악원장 겸임)이 군산국악원 강사로 영입했죠. 그때(1978) 제가 군산국악원 이사였는데, 최 명창 살림집을 구하러 다니던 일들이 어제 일처럼 생각납니다. 최 명창은 인물은 물론, 대인관계도 좋았고, 소리(唱)도 뛰어났죠. 특히 <흥보가> 박타는 대목에서 '흥보가 밥을 하늘로 던져놓고 똑딱, 던져놓고 똑딱, 던져놓고 똑딱' 받아먹는 가락은 어느 제자도 흉내를 못 냈어요." 최란수 명창은 1979년 사단법인 판소리보존회 군산지부 설립을 추진, 초대 지부장을 지냈다. 그 후 제6회 전주대사습대회 판소리 부문 장원, 전라북도 문화상, 제1회 남도예술제 최우수상 등을 받았고, 2002년 전국 국악경연대회를 유치하는 등 군산은 물론 전북의 판소리 보존과 발전에 초석을 다졌다. 이러한 노력은 새만금 전국 판소리·무용경연대회로 이어져 2014년 13회째를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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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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