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조 해직교사들이 2013년 10월 30일 오전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정부의 '전교조 법외 노조 통보'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전교조 설립취소 처분' 철회를 주장했다.
이희훈
"혹시 저 기억하세요? 이것 참, 이렇게 만나네요. 하나도 안 변했어요. 옛날 얼굴 그대로라서 전 바로 알아봤네요."파란색 와이셔츠에 잘 정돈된 머리 스타일, 한 손에는 양복을 접어서 걸치고 다른 한 손에는 까만 가죽 서류가방을 든 채로 내가 일하는 근로자복지센터에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누가 봐도 한눈에 영업사원임을 알 수 있는 말쑥한 인상의 30대 중반 남성이다.
가끔씩 센터에 찾아오는 카드나 보험 판매원이거니 했는데 갑자기 알은척을 해서 적잖이 놀랐다. 누굴까? 순간 기억을 더듬으며 머릿속에 여러 얼굴을 떠올려 봤지만 도무지 누구인지 모르겠다.
"아, 누구시죠? 죄송한데, 잘 모르겠네요. 저를 어떻게 아시죠?"나는 멋쩍게 다시 물었다. 알고 보니 근 20년 전 대학생 시절 알고 지냈던 후배였다. 서로 단과대학이 달라서 얼굴을 자주 보던 사이는 아니지만 용케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근로자복지센터에 찾아온 이유는 노동 상담을 받기 위해서였다. 후배는 70여 명 정도의 중소규모 회사에 다니며 노사협의회 근로자위원을 맡고 있었다. 며칠 전 회사 회식 자리에서 직원들끼리 회사의 여러 가지 불만 사항을 이야기하다가 흥이 올라 '그럼, 차라리 노사협의회 말고 노동조합을 만들자'는 의견까지 나왔다고 한다.
처음부터 노동조합을 준비하기 위해 모인 자리는 아니지만 일사천리로 진행되면서 위원장, 회계감사 등의 구체적 역할까지 이야기가 되었다. 대다수의 직원들이 후배를 위원장으로 추천했고 회식 자리는 마치 노조 결성식처럼 흘러갔다. 다음 날, 이렇게 해서 노동조합까지 결성되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술자리의 약속이라는 게 대부분 그렇지만 어제의 회식 자리에서 오고갔던 이야기를 책임지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노조' 말만 나왔는데 권고사직... "이래도 되는 거예요?"만일 여기서 끝났다면 후배는 근로자복지센터에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회식 자리에서 노동조합 이야기가 나왔다는 사실이 회사 간부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곧바로 회사 인사담당이 후배에게 면담을 요구했다. 인사담당은 후배에게 사직을 받아들이라는 말과 함께 만일 사직을 거부할 경우 강원도 지점으로 발령을 내겠다고 했단다.
실제로 노동조합을 만든 것도 아니고, 단순히 말이 오갔을 뿐이다. 공식적으로 위원장에 선출된 것도 아니고 추천을 받았을 뿐이었다. 이런 경우 인사 발령을 거부하면 사실상 회사가 전권을 가지고 있는 인사권을 침해한 것으로 간주해 얼마든지 징계에 의한 해고가 가능하다. 사실상의 해고 통보인 것이다.
이때 방법은 회사 권고대로 일단 인사 발령에 따른 뒤 부당노동행위 여부를 다투든가, 실업급여라도 받기 위해 권고사직을 수용하든가 둘 중 하나다. 현실적으로 별다른 방법이 없다는 말에 한껏 풀이 죽은 후배를 마주하고 앉아 있기가 참 미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