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제일교회 안마당에 있는 벤치에 앉으면 문화재가 된 옛 예배당이 그림처럼 서있다.
김종성
정동제일교회는 기자처럼 기독교 신자가 아니어도 호기심을 가지게 하는 건축미와 근현대 역사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화려함보다는 고졸(古拙, 오래되고 질박함)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한국적 건축미가 느껴지는 정동제일교회는 정동길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교회 안마당에는 교회의 100주년 기념탑과 함께 정동제일교회를 세운 아펜젤러와 최초의 한국인 담임 목사였던 최병헌의 흉상이 있다. 미국 감리교단의 선교사로 1885년에 한국 땅을 밟은 아펜젤러는 그해 우리 역사 최초의 서양식 근대 학교인 배재학당을 세웠다.
당시 조선은 기독교 전파 활동을 허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교육 사업을 통해 전도를 했다. 이때 그의 나이가 스물일곱. 푸른 눈의 미국인 청년은 마흔넷의 아까운 나이에 그만 사고로 숨지기까지 우리 근대사에 작지 않은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이날도 교회 안마당 벤치에 멀거니 앉아 쉬고 있는데 마침 상하이에서 자매결연을 맺은 노란 단체티를 입은 중국인 신자들이 정동제일교회를 견학삼아 찾아와 옛 예배당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늘 예배당 안에 들어가 보고 싶었던 터라 슬쩍 중국 사람들 줄에 끼어들었다. 단체 티 때문에 금방 들통 날 짓이었지만 인솔자로 보이는 나이 지긋한 한국인 선교사의 호의로 운 좋게 예배당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정동제일교회는 구한말 격동하는 근대 우리 역사의 현장이기도 했다. 구한말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이 정동제일교회를 중심으로 한 정동길을 따라 일어났다. 1895년 일본인들에 의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벌어졌을 때, 정동제일교회를 일군 초대 담임목사였던 아펜젤러는 이곳에서 황후의 추모 예배를 드렸다.
붉은 벽돌의 옛 예배당은 6·25전쟁 때 건물이 반이나 파괴되었지만 여전히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1897년 완공된 예배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회당이고, 현재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19세기 교회 건물이기도 하다. 처음 예배당을 지었을 때는 얇은 휘장을 사이에 두고 한쪽은 남성 신도들 혹은 배재학당 남학생이, 다른 한쪽은 여성 신도들 혹은 이화학당 여학생이 따로 마룻바닥에 앉아 예배를 보았다고 한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근대학교인 배재학당과 개신교회인 정동제일교회(당시엔 벧엘 교회당)를 세운 선교사 아펜젤러는 우리 근대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이다. 정동제일교회는 미국의 장로회 선교사 언더우드가 세운 새문안 교회와 더불어 우리나라 개신교회의 양대 기둥을 이루는 교회라고 한다.
격동의 구한말, 한국 근대사의 한복판에 있던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