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어머니김봉준 작. 이소선 여사 추모 그림
김봉준
노조 사무실을 확보한 다음, 11월 20일 한국노총 회의실에서 삼동회 회원과 평화시장 노동자를 비롯한 관계 대표자들이 모임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전국연합노동조합 청계피복지부(가칭) 결성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노조결성 준비에 착수했다. 준비위원장은 최종인이었고 그밖에 삼동회 회원,평회시장 노동자들, 김성길,김광호 등 노총관계자들이 준비위원이 되었다.
11월 23일 노동조합의 주 사무실을 평회시장 옥상으로 확정했다. 노조결성에 참여한 사람들은 전태일의 친구들인 삼동친목회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전태일이 근로조건 개선투쟁을 하기 이전에 노조결성을 추진했던 세력 그리고 노총이나 연합노조에서 지원 나온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상호 협조와 대립하는 처지였다.
당시 전태일의 친구들은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싸움할 줄은 알았지만 실은 노동조합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 노동조합을 정부에서 만들어 주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노동조합과 노동청을 구별 못 하는 사람도 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너나 할 것 없이 마찬가지였다.
이에 반해서 이전에 노조결성을 추진했던 사람들은 노동조합에 대해서는 웬만큼 알고 있었지만, 그들한테는 투쟁의지가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노조결성을 자신들의 명예나 돈벌이로 여기는 사람도 더러 있는 것 같았다. 이들과 달리 연합노조의 국제부 차장인 김성길 같은 사람은 개인적인 정의감에서 노조결성을 지원했다.
과연 전태일 뜻을 계승할 수 있을지... 이런 상태에서 노동조합 주도권을 두고 신경전이 벌어졌다. 전태일의 친구들은 노동조합 운영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그런데 이전에 노조결성을 추진했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선배들이어서 이들을 제치고 나설 수도 없었다. 더욱 답답해한 것은 이들한테 노조를 맡겨서 과연 전태일의 뜻을 제대로 계승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11월 25일경 평회시장 옥상 노조사무실에서 준비위원회가 열렸다. 지부장을 내정하는 자리였다. 삼동회 회원들과 김성길,황태종,그리고 양정목 등 이전에 노조를 추진했던 사람들이 참석하였다. 지부장 후보를 놓고 전태일 친구인 최종인은 결정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선배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도, 거부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긴장된 분위기가 감도는 가운데 결론을 내지 못했다. 그때 공장에서 일하다가 작업복을 입은 채 이승철이 올라왔다.
"태일이가 어떤 영리를 위해서 죽은 것이 아니니까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람에게 지부장을 맡길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김성길씨가 지부장이 되어야 합니다."이승철이 시원스럽게 말하자 최종인이 벌떡 일어났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태일이의 뜻을 생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최종인이 난처해하고 있었는데 이승철의 말을 듣자 힘이 나서 말했다.
김성길은 한양대학교를 나온 사람으로 연합노조 국제부 차장이었다. 그는 평화시장 건너편 종로 5가에 있는 보건빌딩 근처에서 살았다. 대학교는 나왔어도 원래 그쪽 지역에서 노는 사람들과도 잘 어울렸던 것 같다. 그런데다 연합노조의 직원으로 있으면서 평화시장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시장의 많은 근로자들과 전태일의 친구들한테 더 큰 신경을 쓰게 된 사람이었다.
전태일이 11월 13일 분신한 직후 뒤이어 삼동회 친구들이 혈서를 쓰고 데모를 벌였는데 경찰은 이들을 연행해 구류를 살렸다. 그때 김성길이 경찰서에 찾아와서 최종인을 만났다. 여기서 최종인이 김성길에게 말했다.
"우리 친구들은 엄청나게 많다. 나가면 우리는 끝까지 싸울 자신이 있다." 그 말을 들은 김성길은 최종인의 강렬한 투쟁의지를 보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