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준의 사상적 기원(L'Arche de Nam June)' 장 폴 파르지에(J. P. Fargier)가 제작한 영상. 22분 1981
김형순
그리고 영상 중 하나만 더 소개하면 백남준의 1982년 퐁피두에서 개인전을 앞두고 1981년 '파르지에(J. P. Fargier)'가 제작한 '남준의 사상적 기원'이라는 작품이다. "비디오아트에서 '색(color)'이 시간이라면, 자연에서 색은 섹스이다"라는 말로 시작되는 이 영상은 당시 프랑스예술계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대담에는 백남준의 '돈·사랑·공간·자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맑스는 물론 스탕달, 발레리, 미디어 이론가 맥루한, 존 케이지, 보이스, 마치우나스도 언급된다. 여기서 보면 백남준은 '세기의 철학자'다. 그의 말은 단순하나 사상은 깊다. 비디오아트 방식으로 대담을 연출한 파르지에가 백남준의 천재성을 더 돋보이게 한다.
[이와 관련된 유튜브자료]
http://www.youtube.com/watch?v=2pYAUppfiXk2부 백남준은 왜 독일에서 베토벤처럼 존경 받았나백남준에게 독일은 가장 오래된 고향이고, 라인 강은 그의 예술적 영감을 준 젖줄이었다. 백남준은 라인 강 물결에서 TV주사선을 봤고 "눈부신 날, 라인 강의 물결을 세라"고 노래했다. 예술과 TV를 오묘하게 결합해 '비디오아트'를 탄생시켰다.
부인 '시게코' 증언에 의하면 백남준은 독일에서 예술가에 대한 최고 존칭인 '마에스트로' 칭송을 받았고, 웬만한 카페에 가도 '마에스트로' 오셨다며 융숭하게 대접했고 또한 독일인은 백남준을 "독일에서 공부해 비디오아트를 탄생시킨 자랑스러운 독일제 작가"라고 했단다. 뒤셀도르프 시 전차에는 그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붙어 있다.
독일에서 주는 유명한 예술상은 다 받다

▲ 백남준이 1989년부터 2001년까지 독일에서 받는 '예술상'을 목록화하다
김형순
백남준은 1989년 2회 '쿠르트 슈비터스(K. Schwitters)'상, 1991년 '고슬리 황제반지(Goslar Kaiser Ring)'상,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독일대표) '황금사자상', 1997년 '괴테 상', 1998년 독일 구겐하임개관(1997년) 후 '토머스 크렌스(T. Krens)'상, 2001년 8회 '빌헬름 렘브루크(W. Lehmbruck)'상 등 독일 최고예술상은 다 휩쓸었다.
이는 그가 독일에서 얼마나 인정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징표다. 백남준은 명실공이 독일'명예이주예술가'였다. 그래서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는 그가 독일대표미술가로 나갔다. 그런데 그는 왜 독일에서 베토벤처럼 존경을 받았을까? 이에 대한 답변은 많지만 최근 취재한 독일작가 '알프레드 하르트' 씨의 대담에도 그 단초가 보인다.
"백남준이 독일에서 인기가 높은 건, 알다시피 2차 대전 이전은 프랑스가 세계미술을, 2차 대전 이후에는 미국이 주도했다. 독일은 변방이었는데 70년대 '요셉 보이스'와 함께 백남준이 혜성처럼 나타나 소리와 영상을 뒤섞는 '전자아트'를 창안해 독일미술을 세계적 위상으로 끌어올려 '아트스타'가 되었다. 그는 독일뿐만 아니라 세계미술을 뒤바꾼 그리고 20세기와 21세기를 연결한 '다빈치' 같은 예술가였다" 내가 생각할 때 백남준이 독일에게 환영을 받은 건 바로 2차 대전의 패전국으로 전쟁의 가해자라는 피해의식으로 굉장한 심적 압박과 정신적 충격을 받아 주체할 수 없는 공황상태에 빠져있을 때 천개 손도 모자란다는 '천수관음보살'처럼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졌고 해방감과 통렬한 웃음을 선물하며 새 비전을 제시했기 때문이리라.
시대의 대안을 찾아 고뇌하는 사상가

▲ 1986년 뒤셀도르프 요셉 보이스 제3작업실에서 '쉬튜겐(그의 팔만 보임)'과 대담 중인 모습. 뒤로 "자본주의가 과연 몰락할 것인가?"라는 논쟁거리가 적혀 있다. 사진저작권: 뒤셀도르프 예술박물관 사진아카이브(Museum Kunst Palast AFORK) 백남준문화센터 제공
Museum Kunst Palast
그러면서 백남준은 서구의 눈먼 의식인 '합리주의·과학주의·이성주의'가 결국 괴물 같은 나치즘을 낳았음을 지적한다. 그 대안으로 동양의 통합적이고 일원론적인 사상을 도입해 서구의 이원론적이고 분열적 사고의 대척점으로 제안한다. 그래서 정신과 관념보다는 몸과 일상을 중시하고 생명감 넘치는 야생적 사고를 독려한다.
게다가 동서 문화를 꿰뚫으며 6개 국어를 하는 백남준의 서구에 대한 이해는 유럽의 최고지성도 뛰어넘기에 그에 대한 독일인의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백남준은 서구인을 비판할 때조차도 폭소를 터지게 해 자기편으로 만든 데 능수능란한 유혹자였다. 또한 그의 친화력은 소문이 났고 한번 알게 된 사람에 대한 우정은 참으로 깊었다.
서양 작가들 웃기면서 그들을 설득하다

▲ 백남준 생애와 작품과 관련된 시대의 중요사건과 전시를 일목요원하게 숫자와 사진과 자료를 통해 전시용 유리판에 써놓았다
김형순
백남준은 작은 나라에서 온 예술가가 서양 작가를 능가하려면 그들을 웃겨야 한다는 생각을 했는데 한번은 누가 그의 스승격인 '존 케이지'에게 "당신이 내일 죽는다면 뭐가 제일 아쉽겠는가?"라고 질문했더니 그는 "백남준의 재담을 듣지 못하는 것이 제일 서글플 것"이라고 할 정도였다. 그의 재치 넘치는 유머는 탁월한 아포리즘이었다.
그러면서 백남준은 서구예술의 종언을 선언한다. 예컨대 "현대예술은 예술을 하지 않는 게 예술이다"나 "우리가 세계사의 게임에서 이길 수 없다면 그 규칙을 바꿔라"라든가 30살에 선언한 "황색재앙은 바로 나다"나 그의 부퍼탈 첫 전시의 부제가 '추방'인 것은 그가 기존의 예술을 거침없이 해체하고 전복시켜야 함을 강조한 말이다.
그는 선언만 아니라 실제 몸으로 그것을 보여줬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퍼포먼스가 바로 피아노를 때려 부수는 것이다. 피아노는 서구인의 성상으로 부르주아 교양취미의 상징이지만 서구미술의 출구를 찾으려면 그런 정신이 필요함을 알린다.
'문화칭기즈칸' 백남준, 독일에서 '황제'로 등극

▲ 국립현대미술관(서울관) 3층 디지털정보실에서 붙은 백남준의 큰 사진으로 '호연지기'가 느껴진다. 그는 누가 사진을 찍으려고 하면 그에 걸맞은 자신의 모습을 연출해줘 사진 찍는 사람을 편하게 배려한다
김형순
백남준은 "영원성의 숭배는 인류의 오래된 질병"이라면서 독일인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여러 사회적 우상과 편견을 깨지 않으면 새로운 출구를 찾을 수 없음을 경고한다. 백남준이 피아노를 부술 때, 백남준 이상으로 통쾌함을 느낀 것 독일인이다. 왜냐하면 독일인 스스로 치유할 수 없는 고정관념을 백남준이 대신 깨줬기 때문이다.
'문화칭기즈칸'으로서 백남준은 독일에서 이렇게 '황제'가 되는데 여기에 호형형제하며 지낸 '요셉 보이스'가 좋은 파트너가 된다. 그렇게 해서 백남준의 예술은 시간과 공간을 아우르고, 동양사상과 서양예술을 능수능란하게 결합한 '전자아트'와 '신체아트'를 낳았다. 이는 후에 '위성아트'와 '레이저아트'로 더 발전된다.
그는 이렇게 마네, 피카소, 뒤샹 등을 능가하며 서양미술에서 패러다임을 바꾸는 세계적 예술가가 된다. 백남준은 독일생활 20년 만에 뒤셀도르프 예술대학에 신설된 '비디오'과 교수가 된다. 이 대학은 '리히터', '보이스' 등을 배출한 독일최고의 명문이다. 1977년부터 백남준의 '독일감격시대'는 그렇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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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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