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누엘 갈리엔느. 난민 청년들에게 무료로 프랑스어를 가르쳐주는 시민단체 콜론을 운영한다.
목수정
군대를 피해, 난민 신청을 하러 프랑스에 와서 외롭게 분투하던 예다[2014년 6월 6일자
'유병언 망명 거부한 프랑스, 이 남자는 왜 받아들였나']에게 무료로 프랑스어를 가르쳐주었다는 그분. 예다에게 들은 그녀의 이미지는 두 팔을 벌려 망망대해를 떠돌다 낯선 땅에 표류한 청년들을 품어주는 강인한 성녀의 그것이었건만, 내 눈 앞에 나타난 그녀는 등굣길에 마주치는 여느 학부모와 다르지 않은 인상이었다.
오히려 자신감이 배와 가슴 사이 어딘가에서 위태위태하게 튀어나올 것 평범한(!) 파리지엔느들과 달리 어딘지 수줍어하고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이랄까. 가진 것이라고는 달랑 몸뚱이 하나뿐인 난민 청년들을 강한 팔로 안고서 그들의 새로운 삶의 길잡이가 되어주어야 하는 엄중하고도 고단한 임무를 자청한 이 사람. 어린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하고, 따라서 영위해야 할 자잘한 개인의 일상이 있는 이 여린 외모의 여인은 어떤 방식으로 이 만만찮은 미션을 일상과 조화시켜 나가는 걸까. 그것을 가능케 해주는 에너지는 어디서 기인하는지 알고 싶었다.
오이디푸스가 난민이 되기 위해 머물렀던 그곳그녀가 난민 청년들에게 무료로 프랑스어를 가르쳐주는 시민단체 콜론(Association Kolone)을 설립한 것은 불과 3년 전이다. 신생 시민단체들을 지원하는 기관을 통해 일주일에 다섯 번 공간을 지원받아 난민 혹은 불법체류 중인 청년들에게 무상으로 프랑스어를 가르쳐준다. 16~30세 사이의 외국인으로 자격 조건이 제한되어 있으나 주로 아시아나 아프리카 지역에서 온 18~25세의 청년들이 그녀의 수업을 듣는다. 수업은 간단한 테스트를 거쳐서 3단계로 수준을 나누어 진행한다. 꾸준히 수업에 들어오는 것 외에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없다. 주소도 신분증도 등록비도 그 아무것도.
40대 중반의 그녀가 이 길에 접어든 시간은 의외로 짧은 편이었다. 그전에는 오래 대학에 머물며 철학과 문학을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소포클레스의 고대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 왕>을 주제로 박사준비과정(DEA) 논문을 썼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삼은 오이디푸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비극적 운명을 거스르지 못하고 천륜을 거스른 죄를 통탄하며 스스로 눈을 찌르고 장님이 되어 떠돈다.
안티고네의 도움으로 아테네에 다다른 그는 난민이 되기 전, 아테네 외곽의 작은 마을에서 아테네의 신들에 의해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의식을 치른다. 그에게 평화와 정갈하게 갈아입을 영혼의 새 옷을 건네는 그곳, 바로 콜론이다. 그녀가 만든 시민단체 콜론은 오이디푸스처럼 고향을 떠나 떠돌던 이들을 맞이하여 그들이 새로운 땅에 정착하기 위한 의식을 치르는 곳이다. 지친 영혼이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새로운 몸과 마음을 준비하는 평화로운 장소를 의미한다.
논문을 쓰기 훨씬 전부터 엠마누엘은 줄곧 '난민'이란 존재에 강하게 이끌렸다. 뿌리째 뽑혀 자기 땅을 떠나온 삶,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삶에서 그녀가 느끼던 강렬함은 합리적 설명을 거부하고 야릇한 태생을 지녔다. 전생에 오이디푸스의 어깨를 부축하던 안티고네이기라도 했던 것은 아닐런지. 이 미스터리한 끌림은 그녀의 논문 주제로 펼쳐졌고, 10년의 세월이 흐른 후 그녀의 삶에 더욱 긴밀한 키워드로 자리 잡는다.
랑콤 사의 장미를 구하라 박사준비과정 논문을 마무리하고, 박사과정을 시작할 무렵, 첫 아이를 갖게 된 엠마누엘. 강도 높은 학업과 임신·출산을 병행할 수 없어 그녀는 학업을 잠시 중단한다. 대신 노동 강도가 높지 않은 일자리를 찾았고, 마침 친구가 운영하는 회사에서 흥미로운 일거리를 제안했다. 로레알, 랑콤, 네슬레, 갈리마르출판사까지, 각 분야의 굵직한 기업들의 상품 홍보 문구·이미지에 대해 컨설팅을 해주는 회사였다.
이를테면 신상 화장품을 출시하기 전, 포장지에 어떻게 그 화장품을 소개해야 고객들이 그 상품을 집어들게 할 지 가상의 고객을 불러 미리 테스트해 본다. 상품 용기와 홍보를 위한 어휘 하나하나에 대한 전략을 제시하는 회사였다.
그녀가 처음 맡은 작업은 세계적인 화장품회사인 랑콤 사의 장미에 대한 보고서를 내는 것이었다. 랑콤 사는 그들이 수십 년 동안 사용해온 상징 '장미'에 대해 고민하던 중이었다. "이 장미를 너무 오래 쓴 것 아닐까" "이미지 쇄신을 위해 장미를 버려야 할 시점이 온 것 아닐까" "장미를 고수한다 해도 모양을 좀 모던하게 바꿔야 하는 것 아닐까"… 옷장 앞에 선 사춘기 소녀처럼, 자사의 트레이드마크인 장미를 놓고 고민하던 랑콤 사에 설득력 있는 해답을 제시해주는 것이 그녀가 맡은 첫 임무였다.
한 달 동안 그녀는 세상의 모든 장미를 로고로 하는 기업과 단체들을 찾아내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장미가 상징해온 의미와 알레고리들을 추적했다. 그것이 소비자들 심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등을 분석하여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녀의 결론은 물론 '그 장미를 계속 유지하라'였다. 재택근무이기도 했거니와 제법 흥미진진한 작업인데다가 이 단순한 결론을 위해 회사가 지불한 대가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엠마누엘의 보고서에 만족한 회사의 대표이자 친구가 그녀에게 정식입사를 권했고, 엠마누엘은 이 낯선 세계에 발을 담근다.
난민에게 알 수 없는 매력을 느끼던 한 인문학도의 전혀 다른 세계로의 외도. 초반에는 제법 괜찮은 경험이었다. 일 자체도 충분히 재미를 느끼며 할 수 있었고, 자료조사와 보고서 쓰기에 익숙한 그녀로서는 별다른 노력이 필요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두둑한 보상은 자잘한 불만들을 덮고도 남았다.
그러나 입사 초반 한 달여의 여유를 갖고 인문학, 철학, 심리학의 영역을 넘나들며 다각도에서 소비자의 마음을 자극하는 언어의 조탁 실험을 할 수 있었다면 같은 일을 위해 주어지는 시간은 점점 단축되기 시작했다. 2주, 1주로 빨라지더니, 급기야는 사나흘 만에 답을 달라는 조급한 시달림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세기를 건너서면서 프랑은 유로화로 바뀌고, 대통령 또한 시라크에서 사르코지로 한 단계 더 우경화했다. 이 무렵 프랑스 사회는 급격히 의미를 내려놓고 과정의 즐거움을 축소하는 대신, 그 자리를 긴장과 압박, 단기적 효율로 채워갔다.
급기야 프랑스에 경제위기란 단어가 페스트처럼 상륙했고, 모든 사람이 그 위기라는 병에 감염된 듯 골골대기 시작했다. 위기의 실체를 본 사람은 없으나, 공기처럼 떠다니는 그 신종 어휘의 협박이 세상을 작동시키는 추가적 모터가 되었다는 사실만은 명확했다. 결국 대기업의 배를 불리는 데 기여한 덕에 흡족한 금전적 보상을 받게 된 것 이외에 이 일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게 됐다. 더 이상 그녀가 하는 일에서 어떤 즐거움도 누릴 수 없다는 사실이 명확해졌을 때, 그녀는 성급히 회사 문을 나선다.
대척점을 향해 전력질주하다 그 후로 약 18개월, 살기에 부족하지 않은 실업수당을 받으며 여유롭게 지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아직 제대로 작동하는 사회복지 시스템을 누리며 달콤한 시간을 누리던 엠마누엘은 자신에게 이러한 휴식을 제공해준 사회를 위해 유익한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래서 찾았던 것이 이민자·난민들을 돕는 시민단체 시마드(Cimade)였다. 약 1년간 자원봉사를 하면서 그녀는 자신이 목말라하던 모든 것을 되찾은 듯했다.
그곳에서 엠마누엘은 불안한 영혼들과 만났고, 그것은 그녀에게 불덩이처럼 후끈한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왜냐고 묻는다면 여전히 할 수 있는 대답은 없다. 그것은 그녀에서 알 수 없는 본능이 작동하는 영역이다. 그녀가 대학 시절부터 편집위원으로 활동해온 계간지 바까름(Vacarme)에서 쌓인 영향일 수도 있다. 파리고등사범(ENS) 학생들을 중심으로 90년대에 창간된 이 잡지는 정치와 예술, 학자와 운동가 사이에 다리를 놓고자 하는 진보적 계간지다. 엠마누엘은 초기부터 편집위원이자 고정 필자로 참여해왔다.
그녀의 오랜 열정이 직업으로 연결되는 순간은 예기치 않은 길목에서 찾아왔다. 시마드에서의 자원봉사 활동이 끝나갈 무렵, 실업 급여를 수급하는 동안 의무적으로 가져야 하는 고용안정센터 상담원과의 상담. 일자리에 대한 이러저러한 논의를 진행하던 중, 상담원이 "외국인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쳐보면 어떻겠냐. 당신은 문학도 오래 공부했고,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 희열을 느끼는 사람이니"라고 한마디 던졌던 것이 시작이었다. 멀리서 바라보며 감히 상상하는 데 족하던 그 세상에 두 발을 딛고 서는 도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길로 일자리를 알아보았다. 마침 파리 19구에 있는 청소년 문화공간 상카트르(Le centquatre)에서 외국인 청소년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쳐줄 자원봉사 교사를 모집 중이었고, 엠마누엘은 바로 채용되었다.
파리 중심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된 지역인 19구에 새로 생겨난 이 공간은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모든 청소년들을 위한 공간이다. 이 청소년들이 어느 날 맘 잡고 사회의 한 귀퉁이에 마음 붙여보려고 할 때 길잡이가 되어주려고 상시대기 중이다. 현대미술을 전시하는가 하면 서점, 카페테리아, 공연장 등이 갖춰져 있고 요가, 힙합 강습 등 다채로운 무료 강좌들도 운영한다. 거기에는 프랑스 청소년들도 있지만 이민자의 자녀들과 난민 자격을 얻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온 이들, 불법체류 중인 이들이 모두 뒤섞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