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법은 지키라고 있는 법인가요?

정지선의 환상에 대하여

등록 2014.08.05 18:10수정 2014.08.05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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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4월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코너 '이경규가 간다 - 숨은 양심을 찾아서'가 전설적인 첫 방송을 시작했다. 프로그램의 기획의도는 사회규범을 준수하는 사람들을 찾아내 널리 알리는 것으로 첫 방송의 주제는 정지선을 지키는 사람을 찾는 것이었다. 정지등이 켜졌을 때 차량이 정지선을 넘지 않으면 되는 것으로 처음엔 곧 양심의 주인공이 나오리라 여겼으나 촬영은 날이 저물고 자정을 지나 늦은 새벽까지 이어졌다.

한적한 도로에서 정지선을 지키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누구도 지킬 것 같지 않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제작진과 시청자 모두가 머릿속에 실패를 떠올렸을 그 순간 거짓말처럼 작은 승합차 한 대가 정지선 앞에 멈춰섰다. 깜깜한 새벽, 인적없는 도로. 주인공은 지체장애를 앓고 있던 어느 부부였다. 그 유명한 양심냉장고의 첫 번째 주인이 탄생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이 방송이 있은 다음날의 교실 풍경은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도시의 누구도 지키지 않은 선을 모두가 잠든 새벽 묵묵히 지켰던 선한 사람. 그가 마침 지체장애를 앓던 작고 여린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사건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었을까. 지난밤 방송을 본 아이들은 보지 않은 아이들에게 앞다퉈 지난 밤의 감동을 전했다. 우리에게 그는 양심이 잠든 도시를 일깨우는 유일한 선한 사람이었으며 신호등 앞의 정지선은 곧 선과 악을 가늠하는 신의 저울이었다.

정지선의 환상

정지선에 대한 생각이 바뀐 것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나서였다. 독일 등의 선진국에선 정지선을 지키는 시민이 절대다수이며 이는 시민의식의 차이가 아니라 신호등의 위치 때문이라는 어느 글을 읽고 나서였다. 글에 따르면 서구 선진국에서는 신호등이 정지선과 상당한 거리를 두고 설치되어 있으며 이로 인해 운전자가 신호를 보다 일찍 감지하고 여유있게 차량을 정지시킨다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한국의 신호등은 정지선과 충분한 거리를 두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 신호가 바뀌었을 때 차량이 정지선을 넘기가 십상이다. 다시말해 지키기 어려운 규칙을 만들어 놓고 이를 지키기를 강요하고 있다는 뜻이다. 정지선을 지키지 않는 것이 부족한 시민의식과 숨어버린 양심 때문이라 생각했던 내게는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정지선은 선을 가려내는 신의 저울이 아니었다. 시스템의 오류를 감추는 환상이었다.

정지선의 환상이 신호등 앞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뉴스를 통해 자주 정지선의 환상을 목격한다. 얼마 전 세월호 침몰 참사에서 생존한 단원고 학생들이 안산에서 국회까지 도보행진을 한 일이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무엇이라도 하고자 했던 아이들의 절절한 발걸음이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언론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일부 언론은 이 행진에 담긴 사회적 의미에 주목했지만 다른 몇몇 언론은 이를 거리행진이라 표현하는 등 의도적으로 불법시위의 뉘앙스를 풍겼다. 사실 시민들의 집회와 시위를 불법으로 낙인찍고 손가락질 하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집회, 결사의 자유는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권리인데도 이를 보장하기 위해 마련된 집시법을 악용해 상당수의 시위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처벌하는 것이 지난 정권들의 행태였다.

우리사회엔 수많은 정지선의 환상이 존재한다


현 정권의 경우엔 그 정도가 심하다. 지난 5월 19일 오후 7시 서울 시청광장에 모여 '세월호 추모 거리행진'을 벌이던 시민 215명이 강제 연행되었고 다음날 같은 장소에서 20대 청년 50여명이 전날의 일을 규탄하기 위해 거리행진을 진행하려 했지만 행진 시작 5분여만에 경찰의 통제로 무산되었다. 이에 앞서 2013년 6월에는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및 시민들이 쌍용차 정리해고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대한문 앞에 분향소를 차리고 천막농성을 진행했으나 경찰과 중구청에 의해 강제해산된 바도 있었다.

이뿐 아니다. 정권은 거리행진은 물론 촛불집회나 심지어는 삼보일배 등에 대해서도 일몰 후, 거리점거, 집회 미신고 등의 온갖 사유를 들어 불법집회로 몰아가고 탄압하기 일쑤다. 하지만 사실상 합법적인 시위를 하기가 어려운 상황을 만들어 놓고 현행법을 강제하는 건 시위를 하지 말라는 것이나 진배없다. 집시법은 또 다른 정지선의 환상이다.

집시법 이외에도 우리사회에는 수많은 정지선의 환상이 존재한다. 노동조합의 파업권을 제도적으로 제약하는 노조법이나 폐지논란이 있는 국가보안법 등이 이에 해당할 수 있다. 정지선이 신호등의 부적절한 위치 탓에 지켜지지 않았던 것처럼 이런 문제들도 시스템 그 자체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문제는 고작 정지선을 조금 넘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일요일 일요일 밤에 #이경규가 간다 #양심냉장고 #정지선 #집시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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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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