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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이리 좀 와봐. 엄마가 예쁜 것 보여줄게."
내 말에 아들은 궁금한 표정을 방에서 나와 거실 탁자로 모였다.
"뭔데요? 어, 이 스케치북은?"
"그래. 기억하지? 봄에 엄마가 개나리, 철쭉, 라일락 꽃송이를 따다가 넣어둔 거. 엄마도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다가 스케치북을 보고 가져 온 거야."
어느새 내 목소리는 한 옥타브쯤 높아져 있었다.
"맞아, 그 때 나도 하고 싶었는데 시기를 놓쳐서 못했었어. 대신 엄마가 주기로 했었죠?"
"어디 봐요. 정말 그 모습 그대로인지."
"자, 어디 그럼 볼까?"
아이들의 궁금한 눈길과 조심스러운 내 손길로 스케치북을 열었다. 그 때 그 모습 그대로인. 화사한 봄을 바라는 마음으로.
"어?"
"엄마, 이건 아닌데?"
"......."
이게 웬일인가? 스케치북을 열자 그 속에는 보기에도 흉측한, 꽃이라기 보다는 썩은 물에 잠겨 퉁퉁 부은, 그래서 악취가 나는 것 같은 모습을 드러냈다. 예상 밖의 결과에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쉰을 훌쩍 넘긴 나이인데도 아직 마음 한 구석에는 어린 마음이 조각처럼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해마다 가을이 끝날 무렵이면 집 근처에 있는 공원으로 가서 떨어진 낙엽을 주워 스케치북 사이에 꽂아두어 말리곤 한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낙엽이 본 보습을 되찾으면 그 위에 투명 시트지를 붙인 후, 가위로 잘라 책갈피로 쓰기도 하고 장식용이나 소품의 재료로 Tm기도 한다. 특히 플라타너스 잎처럼 큰 낙엽을 모으는데 잘 말린 플라타너스 잎 안쪽으로 종이를 잘라 그 종이에 편지를 쓰고 나서 다시 낙엽위에 붙이고 나서 투명 시트지를 양쪽으로 붙여 모양대로 자르면 근사한 편지가 된다. 보내는 이의 정성에 가을의 향취가 묻어나는. 덕분에 우리 집 식구는 물론 친구들도 그런 편지를 한 묶음씩 받아보았다. 그래서 낙엽을 주워 말리는 일은 가을미면 으레 하는 일이 되고 있다.
그러다가 지난 봄 어느 날, 하루, 화사하게 피어난 꽃들을 보고는 그 색깔 그대로 간직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며칠 동안 아파트 화단을 서성거리며 눈도장을 찍고는 날을 잡아 꽃을 꺾었다.
"꽃은 여러 사람이 함께 보며 아름다움을 나눠야 하기 때문에 꺾는 것은 나쁜 일이야. 그리고 꽃을 피우기 위해 나름 애써온 꽃나무에게도 허망한 일일 테니 꺾기 보다는 그냥 두고 보는 게 좋은 거야."
아이들이 어렸을 때 기본적인 도덕성을 가르친다며 꽃을 꺾지 말라고 했었는데 정작 지금은 내가 욕심을 채우느라 꽃을 꺾는다는 생각에 괜히 주변을 살피고, 발길을 주춤 거리고.
노란 꽃송이가 종처럼 달려 있는 개나리꽃 나무 서너 가지. 분홍빛 꽃송이가 처럼 피어있는 철쭉꽃 나무 두 가지. 보랏빛 꽃송이가 포도송이처럼 맺혀있는 라일락꽃나무 서너 가지. 그렇게 꺾어온 꽃들이 행여라도 빛이 바랄까 나는 투명 시트지로 싼 후 스케치북 사이에 넣어 두었다. 나중에 그 모습 그대로를, 화사한 봄을 다시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으로.
"어쩜, 이렇게 되어버렸지? 괜한 짓을 했구나. 그냥 두고 볼 걸."
"빨리 버려요. 벌레라도 잇는 것 같아요."
"그러게. 꽃은 보는 것으로 만족을 해야 하나 봐요. 꺾는 순간 아름다움 사라져 버리니..."
나는 엄지와 검지 손가락만으로 그 시트지를 들고, 혹시라도 벌레가 나올지도 몰라 비닐봉지에 넣고 입구를 꽁꽁 묶은 후 곧장 쓰레기통으로 가져가 버렸다. 그 때의 꺼림칙한 기분이란.
가장 아름다운 꽃을 가장 더러운 쓰레기로 만들어버린 내 욕심이 후회스러웠다. 그 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 이외의 것을 얻기 위한 욕심을 채우기 위해 정직하지 못한 방법으로 남의 눈을 피하거나 속인가는 과정이야 말로 가장 더러운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년 봄에는 어줍잖은 욕심을 버리고 그냥 눈으로 보고 즐기리라. 화사한 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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