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들의 돈벌이 장소, 순종의 치욕 서린 거리

대구 북성로를 걷는 내 다리, 왜 천근같이 무거울까?

등록 2014.08.18 15:16수정 2014.08.18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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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에 이미 양주와 양식을 팔았던 오오미야 주점 건물. ⓒ 추연창


등 뒤로 대우빌딩을 둔 채 북성로를 바라본다. 입구 오른쪽 첫째 건물에 안동슈퍼와 성수소방 간판이 보인다. 일제 강점기 시절 오오미야 주점이 있던 2층 건물이다. 오오미야 주점은 지금부터 대략 80년 전에 이미 맥주만이 아니라 양주와 양식까지 팔았다. 당대 대구 최고의 최첨단 신식 주점이었다.

오오미야 주점이 왜 이 자리에 있었을까? 대답은 대구역이 해준다. 1905년 경부철도선 개통(대구역 영업 개시)과 1906년 대구읍성 성벽 파괴 이전부터 일본인들은 북성로 일대 땅을 매입했다. 대구역사가 지금의 시민회관 자리에 들어선다는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들은 남성로에 대구역사가 들어선다는 헛소문을 퍼뜨려 북성로 일대 땅값을 떨어뜨린 뒤 대거 이곳을 매입했다.


당연히 대구읍성 중 북쪽 성벽이 가장 먼저 파괴됐다. 일본인들은 친일파 대구판관(대구시장) 박중양에게 "장사에 방해가 되니 성벽을 부수어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일본인들은 읍성 밖에서만 장사를 할 수 있도록 제한돼 있었다. 박중양은 중앙정부의 불허에도 불구하고 성벽을 없애버렸다.

8월 8일 북성로를 걷다가 본 대구읍성 파괴 당시 분산물로 나온 듯 여겨지는 돌들. 공사 중 땅속에서 나왔다. ⓒ 추연창


대구역 앞 대우빌딩 자리는 시외버스 정류장이 됐고, 중요 교통회사들의 차고지도 됐다. 자연스럽게 북성로는 대구역에서 큰시장(서문시장)과 약령시로 오가는 길목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 결과 영남대로가 지나가는 영남제일관(대구읍성의 정문) 일대인 남성로를 대신하여 북성로 일대가 대구 최고의 상권이자 핵심 교통 요지로 부상했다.

북성로에는 하루가 다르게 신식 건물들이 성로를 따라가며 들어섰다. 상권은 날로 번창했다. 오오미야 주점은 물론, 대구 최초의 백화점 미나까이 오복점이 북성로에 들어선 것도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 백화점은 대구 최초로 엘리베이터까지 설치돼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엘리베이터를 한번 타보려는 사람들로 북성로는 북새통을 이루었다.

북성로 1가 63번지의 미나까이 백화점은 5층으로, 당시 대구 최고층 건물이었다. 이 건물은 1964년 대우그룹으로 소유주가 바뀌었다. 대우는 새 빌딩을 짓기 위해 건물을 철거했지만, 그 이후 건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금은 자동차들이 오르내리는 거대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구 최초의 백화점이 있었던 자리. 지금은 대우주차장이 되었다. ⓒ 추연창


대구 최초의 대중 목욕탕이었던 북성로의 건물 ⓒ 추연창


북성로에는 또 대구 최초의 공중목욕탕도 들어섰다. 역시 북성로는 대구 최고의 번화가였다. 공중목욕탕의 이름은, 그 이름만 보아도 건축주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이 짐작되는, 조일탕(朝日湯)이었다.


북성로 1가 30-1번지의 이 건물은 현재 경북자동차매매사업조합이 사용하고 있다. 미나까이 백화점 터 가기 직전 오른쪽으로 난 좁은 도로 안 우측 두 번째 건물이다. 사업조합 간판이 붙어 있어 찾기가 쉽다.

1950년대 전쟁 중에도 북성로는 여전히 번창했다. 안동슈퍼 약간 대각선 자리인 성미초밥 (북성로 1가 81-3) 2층은 피난 문인들이 즐겨 찾던 청포도다방이었다. 청포도다방에서 약간 더 위쪽에 있는 낙원식당(북성로 1가 31) 2층 역시 문인들이 많이 출입한 모나미다방이었다. 그런가 하면 낙원식당 맞은편 북성로 1가 21-14번지의 신진이발기구 2층도 유명한 백조다방이었다.


피난 온 문인들이 즐겨 드나들었던 청포도다방 건물 ⓒ 추연창


미나까이 백화점 터였던 주차장은 이들 다방 터들보다 조금 더 북성로 안쪽에 있다.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데서 짐작되지만, 백화점 터는 작은 네거리의 한쪽 모서리를 차지하고 있다. 주차장 다음 네거리는 공북문 터이고, 그 다음 네거리의 오른쪽이 조일탕 건물이다.

공북문은 영남제일관(남문), 진동문(동문), 달서문(서문)과 더불어 대구읍성의 4대문이었다. 공북문(拱北門)은 북쪽(한양)에 계시는 임금을 향해 공손히 두 손을 모은다는 뜻의 이름이다. 그런데 친일파가 부숴 없애버린 공북문 아래를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이 지나갔다. 그것도 이토 히로부미의 강요로 달성공원의 신사에 참배하기 위해서였다.

공북문 자리에 서서 달성(공원) 쪽을 바라본다. 이곳에 공북문을 복원하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물론 공북문 문이 아니라 4대문을 모두 복원해야 하리. 본래 모습과 전혀 다르게 복원되었다는 비판에 시달리고 있기는 해도 영남제일문은 동구 망우공원에 복원되어 있지만, 나머지 세 문은 흔적도 없다.

그렇게 하릴없는 상념에 젖었다가 다시 북성로를 바라본다. 비교적 넓게 뻗은 북성로가 대구은행 북성로지점이 있는 서성로 모퉁이까지 거침없이 이어진다. 그런데 중간쯤에 오른쪽으로 들어가는 길 하나가 나뭇가지처럼 뻗어 있다. 삼거리인 것이다.

공북문 터에서 바라본 북성로. 이 길을 처음 가는 분은 사진을 보고 대구읍성의 북문이었던 공북문 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추연창


순종은 오른쪽 길을 이용해서 달성공원까지 갔다고 알려졌다. 그래서 수창초등학교 담장을 타고 이어지는 길에는 "어행(御行)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필자는 순종이 간 길을 따라서 걸어왔다. 일인들의 요구로 대구읍성 성벽 중 가장 먼저 파괴된 자리에 난 길 북성로, 일인들의 상혼이 빛을 발휘했던 북성로, 국왕이 이토에게 이끌려 신사 참배를 위해 강제로 지나갔던 북성로, 그 북성로를 한참부터 걸어왔다.

그래서인지 길을 걸으면서도 기분이 착잡하다. 이 길을 답사자에게 설명하는 것이 과연 옳은 행동인가? 자칫하면 치욕의 역사는 묻거나 왜곡하고, 일제와 친일파들의 행적 설명을 통해 식민사관을 퍼뜨리는 우행을 저지르는 것은 아닌가? 그런 의문이 마음속에서 줄지어 자생하는 까닭이다.

그래도 어행길을 걸어보기로 한다. 좋게 말하면, '어둠의 역사'를 답사하는 것이다. 어둠의 역사를 통해 미래의 바람직한 역사를 찾아보자는 말이다. 자칫하면 합리화가 될 가능성이 높다. 조심할 일이다. 그 점을 조심해가면서 여행기를 써야 하고, 또 답사자들을 안내해야 할 것이다. 거듭 필자는 그 점을 되뇌면서 이 길을 걷고, 그리고 글을 쓸 각오를 스스로 밝혀 '신독(愼獨)을 천명한다.
#순종 #이토히로부미 #북성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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