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 감옥 내 단재 신채호 선생 소개글여순감옥에서 분사한 단재 신채호 선생의 수감동에 있는 소개글. 단재 선생의 수감 옥사는 명확히 있지 않지만 감옥 안에 단재 선생의 기록을 남겨 그의 역할을 기리고 있다
조창완
단재를 아는 사람들은 그래서 더 큰 존경과 안타까움을 가진다. 1936년 단재가 차가운 시신으로 고국에 돌아왔을 때 일제의 서슬 퍼런 눈이 있었지만 만해 한용운이 기금을 마련하고, 오세창이 비문을 썼다.
방송 제작 등 여러 가지 인연으로 필자는 중국내 단재 선생의 유적을 수차례 답사했다. 그중 가장 안타까운 곳이 단재 선생이 서거한 따리엔이다. 한반도를 향한 두 개의 반도 중 하나인 랴오닝반도의 최남단 도시인 따리엔은 중국 근대사의 가장 상징적인 도시다. 청일전쟁 후에는 부동항과 동아시아 야욕을 가진 러시아가 조차(租借)했고, 러일전쟁 이후에는 대륙에 대한 야욕을 가진 일본에게 조차당하는 비극의 땅이기 때문이다.
따리엔에서 한시간여를 달리면 뤼순(旅順)이 있다. 이곳은 군사도시여서 아직까지 외국인의 공식 방문을 막는 곳이다. 뤼순이 우리에게 남다른 것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가 1910년 3월26일 이곳에서 처형됐고, 그로부터 약 26년 후인 1936년 2월 21일에 이곳에서 단재선생이 옥사했다.
지금도 감옥 안에는 단재 선생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단재선생이 쓴 '조선혁명선언'의 일부가 있다. "민중은 우리 혁명의 핵심 역량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이다. 우리는 군중 속에 들어가…"로 시작된 이 글은 의열단을 이끌던 김원봉의 부탁으로 1923년 1월에 써준 것이다. 만해 한용운(韓龍雲)의 '조선독립의서'와 더불어 식민지 시대 2대 명문장으로 꼽히며 아무리 힘들어도 결코 굴하지 않아야 하는 민족의 사명을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