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호 사무국장한국내셔널트러스트 , 늘 행사 진행에 고생이 많다.
김수종
1633년 서남해의 방어를 더한층 강화하기 위하여 삼도통어사(三道統禦使)를 교동에 두고, 삼도, 즉 경기·황해·충청을 통괄하게 했다. 1895년 이후 강화군에 속하게 되었다.
인구는 한국전쟁 뒤 몰려온 피난민으로 1965년에는 1만2500명에 달해 최고를 이루었다. 현재는 교동면 인구는 3000명 정도이다. 특산물인 교동쌀의 생산량이 많고 질이 좋아 다른 지방으로 많이 팔려나간다. 그리고 밭에서 하는 인삼재배가 많고, 화문석도 이름이 높다.
육지와 격리된 섬인 까닭에 고려 중엽부터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왕실의 유배지로 이용되었다. 교동도 사람들은 오랫동안 강화와 동급의 부사가 부임했던 교동도를 외지인들이 강화의 부속 도서로만 생각하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
그리고 예부터 석모도와 교동도 사람들은 배를 타고 황해도 연백장을 보러 다닌 관계로, 자신들은 강화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교동사람이라고 칭하는 것을 좋아한다. 강화와는 다른 역사와 관청이 있었고, 물산이 풍부하며 경제 및 생활권이 달랐으며, 왕실의 귀양지였다는 사실을 긍지로 여기며 사는 것이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는 지난 7월 초에 개통된 '교동대교'를 건넜다. 아직도 군인들이 검문하고 있어 불편하기는 했지만, 인원 파악을 하는 단순한 행위였다. 버스는 바로 '고구저수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