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누가 피부에 흡수되는 기분을 아시나요?

[공모-나는 세입자다] 옥탑방이 만들어준 잊지 못할 추억 두 가지

등록 2014.08.20 17:27수정 2014.08.20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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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 취직을 한지 1년도 안된 1996년 여름이었다. 학교 다니면서 자취를 했던 옥탑방을 벗어나지 못한 채 여름 더위와 씨름을 하면서 살고 있었다. 옥탑방 생활을 경험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옥탑방의 여름 무더위와 겨울 추위는 정말 대단하다. 화장실도 좁을 뿐만 아니라, 주인집이 옥상에 빨래를 널러 오는 경우도 잦아서 사생활 침해도 많이 받는 편이다.


바라보는 풍경만 조금 좋을 뿐인데, 사실 집에 있을 시간이 많지 않아서 내게는 정말 의미 없는 장점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드라마나 영화에서 옥탑방을 낭만적으로 그리는 것을 보면 의아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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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아 나와라! 30분 동안 샤워기 구멍만 바라보는 심정을 아실까요? ⓒ 이경운


비누와 샴푸가 온몸에 흡수되는 기분?

요즘은 거의 없지만, 1990년대의 옥탑방은 낮은 수압으로 인해 수돗물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일이 잦았다. 특히 아래층에서 물을 사용하게 되면 옥탑방에서 물을 쓰기가 힘들었다. 모터를 별도로 달아 옥탑방에서도 수돗물을 제대로 사용하는 집도 간혹 있었지만, 내가 사는 집은 그런 최신 설비가 없었다. 그래도 혼자 사니 물을 많이 사용할 일은 없어서 잘 참고 사는 편이었다.

그런데 회사에 다니면서부터 조금씩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래층의 사람들과 라이프 사이클이 같아지면서 물을 주로 사용하는 시간이 거의 동일하게 된 것이다. 하루는 퇴근 하고 들어와 개운하게 샤워를 하려고 좁은 화장실에서 샤워기로 물을 뿌리고 온몸에 비누칠을 했다. 한꺼번에 해결하겠다고 머리에 샴푸까지 하고 있었다. 이제 물로 샴푸와 비누만 씻어내면 되는 순간인데, 샤워기에서 '클럭~ 크러럭'하며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비상상황이 발생했다.

"앗, 이것은 분명 아래층에서 물을 사용하면서 올라오던 물이 내려가는 소리?" 


그 후로 나는 30분 동안 좁은 옥탑방 화장실에서 꼼짝없이 갇혀 있었다. 온 몸으로 비누와 샴푸를 흡수하면서 간절하게 수돗물이 나오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파~팟' 하고 샤워기가 물을 뿜어내기 시작했는데, 이미 비누와 샴푸 거품은 내 피부의 일부가 된 후였다. 그 이후로 내 피부가 이 모양이 되었고, 머리카락도 슬금슬금 하나씩 빠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의구심이 든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 그나마 여름이라 다행이었다. 한겨울에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면? 아, 생각도 하기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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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옥탑방 화장실은 이렇지 않습니다. 좁은 공간에 겨우 작은 변기와 샤워기 하나가 붙어있었습니다. ⓒ 이경운


옥탑방에서 웬 마법 양탄자 타기?

어느 날 밤은 여름 더위에 비까지 억수로 왔다. 회사에서 동료들과 가볍게 음주를 하고 들어온 날이었다. 샤워를 별 어려움 없이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시원하게 샤워를 하니 술김에 잠이 솔솔 잘도 왔다.

꿈을 잘 꾸지 않는 편인데, 그날 밤은 아주 특이한 꿈을 꾸었다. 내가 알라딘이 되어서 마법양탄자를 타고 막 날아다니는 게 아닌가? 꿈이었지만 요즘의 4D 영화를 보는 것처럼 실감이 났다. 온 몸이 붕 떠서 날아다니는 느낌이 들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하반신이 축축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잠결에 "아이고 이 나이에 자다가 지도를 그렸나?" 싶어서 창피한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지도를 그린 것은 아니었다. 그럼 그렇지! 그런데 기쁨도 잠시 옥탑방에 물이 차올라 요가 물 위에 둥둥 떠 있었던 것이다. 자다가 웬 물벼락인지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니었다.

어쨌거나 그날 밤은 어찌할까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실례를 무릅쓰고, 옥탑방을 버리고 주인집으로 내려갔다. 주인아주머니께서 깜짝 놀라 나오셨는데,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출근해야 하니 그냥 여기서 잠시라도 자라며 이불을 내 주셨다. 아주머니의 마음이 고맙기는 했지만, 그날 밤은 주인집 거실에서 정말 불편하게 잠을 잤다. 아주머니와 남매가 있는 집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감사하기도 하고, 굉장한 실례를 한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죄송한 마음이 든다. 

비가 많이 와서 물이 스며든 것이라 생각했는데, 나중에 원인 조사를 해보니 파이프가 터져서 누수가 생긴 것이라고 했다. 요즘은 집에 파이프가 터져서 물벼락을 맞으면 로또 1등이 된다며 로또를 산다는데, 당시에는 로또가 없었으니 주택복권이라도 살 걸 그랬다. 그랬으면 고단한 인생이 조금은 편하지 않았을까? 이런 부질없는 생각도 해보지만, 어찌됐건 그날 옥탑방에서 물 양탄자를 탄 경험은 잊을 수가 없다. 

지금은 웃을 수 있는 추억이지만...

요즘 후배들에게 옥탑방의 추억을 이야기하면, 재미있어는 하지만 이해하지는 못한다. 지금이야 나도 이렇게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일이 되었지만, 사실 이 일들이 일어날 당시에는 매우 심각했다.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했던 시골 출신 사회 초년생의 현실은 우울했다. 결혼을 해서 옥탑방 세살이를 벗어나기 전까지 앞에서 언급한 것과 비슷한 일들이 생길 때 마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당시 연애하던 아내도 좁은 옥탑방에 놀러온 적이 있었는데, 엄청 답답해 하던 생각이 난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옥탑방 세살이는 인생의 힘들었던 시기를 기억하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게 해주는 소중한 추억이기도 하다. 앞으로는 드라마에서 옥탑방 이야기가 나오면 조금은 낭만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덧붙이는 글 '나는 세입자다' 응모글
#나는 세입자다 #옥탑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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