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30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유학 이민 박람회'에서 시민들이 관련 상담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많이 아쉽지만, 더 이상 너랑 술 못 먹게 될 것 같다."
순간 덜컥 겁이 났다. '하루가 멀다 하고 술을 즐기더니만, 결국 사달이 났나' 싶어 조심스럽게 "(간암) 몇 기"인지를 물었다. 그랬더니 대뜸 무슨 악담이냐며, 올해 말 가족들과 함께 덴마크로 이민을 떠나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몇 년 전부터 준비한 거라면서 당장은 3년짜리 체류 비자로 나가는 거지만, 취업해 자리를 잡게 되면 무난히 영주권을 얻게 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는 학창 시절 친구들 사이에서 내로라하는 '술꾼'으로 통했지만, 졸업하고 나서야 철들어 공부해 자리를 잡은 나름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학과 공부는 접어놓은 채 오로지 조국의 미래를 걱정했던 '열혈청년'이,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여러 기업들로부터 러브콜을 받을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은 정보통신 분야 기술자로 거듭난 것이다. 또래들 중 가장 잘 나갔던 그가 돌연 지구 반대편 낯선 나라로 이민을 떠나려는 이유는 뭘까.
그는 그곳에 친인척이 살고 있지도 않을 뿐더러 그 나라에 대해 아는 거라곤 '인어공주'와 '덴마크 우유'밖에 없다며 허허실실 말했다. 세계적인 장난감 '레고'가 덴마크의 것이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그가, 겁 없이 그것도 가족을 데리고 이민을 가겠다고 하는 게 도무지 납득이 안 됐다. 이쯤 되면, 이민이 아니라 차라리 난민에 가깝지 않을까. 그의 무모함을 비아냥거리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돈키호테 같은 너로 인해 애꿎은 처자식 고생시킬 게 불 보듯 뻔한데, 네가 대학 시절 그토록 오매불망 하던 조국을 등지려는 이유가 대체 뭐냐?""아무렴 별 고민 없이 덜컥 이민 결정을 했겠냐? 지난 몇 해 동안 아내와 함께 꿈꾼 게 있어. '단 하루라도 상식이 통하는 환경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 초등학교 때는 몰랐는데, 아들 녀석도 중학교에 입학하더니 시나브로 불합리한 사회에 적당히 물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다 이번 세월호 참사를 보며 결심을 굳혔어. 가족 모두 의기투합한 셈이고 행복하자고 떠나려는 거지만, 솔직히 마음이 편치만은 않아. 말하자면, 침몰하는 배에서 나만 빠져나오려는 것처럼 느껴지는 불편함 같은 거지. 그래도, 이런 잔인하고 몰상식한 나라에 적어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자식만큼은 살게 하고 싶진 않아." 전화를 끊자 오만가지 감정이 머리를 스쳤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면서도 가슴으론 동의할 수 없었고, 그건 이민이 아니고 도피라며 못마땅해 하면서도 그의 후련해하고 들뜬 목소리가 왜 그리 부럽던지. 당장 이민을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신세에 대한 자괴감과, 상식이 통하는 나라를 꿈꾸는 그 어떠한 노력도 결국엔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열패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학 때 마주앉은 술자리 같았으면, 이민을 가려는 그에게 불호령을 내렸을 것이다. 아니 그 역시 아무리 여건이 허락된다 해도 이민 운운하는 건 꿈조차 꾸지 않았을 것이다. '후세에게 아름다운 조국을 만들어 물려주는 것이 우리 세대의 몫'이라며 젊은 시절 호기롭게 외쳐온 그와 나다. 그 다짐과 패기는 다 어디 가고, 도망치듯 이민을 떠나고, 또 그걸 부러워하나.
정말 이 나라는 세월호를 잊은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