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현박물관 오리영우(梧里影宇-이원익 사당)에 있는 이원익 대감의 영정
유혜준
올해로 23번째 열린 '오리문화제'는 다섯 차례나 영의정이 되었으나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청빈하게 살았던 이원익 대감의 삶을 되새기게 하기에 충분하다. 영의정이 어떤 자리인가.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 불리면서 당대 최고의 권력을 누리는 자리가 아닌가.
지금으로 얘기하면 국무총리인데, 다섯 번이나 영의정을 지낸 이가 비바람이 새는 초가에서 끼니를 걱정하면서 산다? 관직에 있으면서 재산을 불릴 기회가 엄청나게 많았을 텐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 아닌가. 그건 그가 국가가 인정한 '청백리'였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 영의정이 된 것은 선조 때였다. 이후 광해군과 인조를 거치면서 그는 다섯 번이나 영의정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에 함락된 평양성을 이여송과 함께 탈환하는 공을 세웠다. 광해군 때 인목대비를 폐하는 일을 반대하다가 유배를 당했던 그는 인조 때 다시 영의정으로 복귀했다.
인조가 왕이 된 뒤,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는 여론이 돌자 오리 대감은 광해군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오리 대감은 광해군 때 자신이 영의정을 지냈으니 광해군을 죽인다면 자신도 관직을 떠나야 한다고 주장해 광해군을 살렸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관직에 연연해 하지 않고 바른말을 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던 오리 대감의 인품을 엿볼 수 있다.
오리 대감은 직접 쓴 유서를 통해서 "후손들 간에 우애를 잃지 말고 검소할 것과 자신의 장례 또한 간소하게 치를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이런 이의 삶은 당연히 되새기고 오래 기억하고 기리는 게 맞다. 기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본받아야 한다. 돈이 세상의 모든 것을 지배하면서 곳곳이 썩어 있는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덕목은 '청렴결백'이다. 그런 면에서 오리 대감은 우리가 오래 기억해야 할 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