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란 서울시 인권위원장.
권우성
"보통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정책을 다 만든 뒤에 한두 차례 공청회를 열고나서는 '시민 의견을 들었다'고 한다. 과연 이런 방식을 통해 시민의 의견이 얼마나 반영될까."문경란 서울시 인권위원장은 시민들의 손으로 직접 '서울시민 인권헌장'을 제정하려는 이유를 이같이 설명했다. 서울시민의 생각이 들어간 헌장이 나오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시민의 손에서 만들어져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시민이 누려야 할 인권과 서울시의 책무 등이 담길 예정인 '서울시민 인권헌장'은 서울시가 뽑은 시민위원 150명이 참여해 제정 중이며 30명의 전문위원이 자문 역할로 돕고 있다. 안경환 전 국가인권위원장이 '서울시민 인권헌장 제정 시민위원회'의 위원장을, 문 위원장이 부위원장을 맡았다.
시민 인권헌장은 국외에서 캐나다 몬트리올과 호주 빅토리아, 국내에서 광주시가 제정한 바 있다. 하지만 시민이 직접 헌장 제정에 참여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구체적인 조항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크게 ▲ 안전 ▲ 복지 ▲ 환경 ▲ 문화 등 생활과 밀접한 여러 분야에서 시민이 누릴 인권 가치와 규범을 담으려 준비 중이다. 문 위원장은 "환경과 문화 쪽 분과에 지원자가 많았다"며 "이제 서울시민들도 단순한 개발보다는 쾌적한 도시환경을 누릴 수 있는 권리에 관심을 기울이는 듯하다"고 전했다.
일각에서는 성소수자 차별 금지 내용 포함 여부를 두고 벌써부터 반발하는 목소리가 일고 있다. "동성애 합법화 내용을 적극적으로 넣으려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다. 문 위원장은 "시민위원회 내부에서도 (동성애에) 반대한다고 적극 손든 분이 있다"며 "의견 차이를 어떻게 헌장에 담아낼 것인가는 시민위원들의 몫"이라고 말했다.
서울시민 인권헌장은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의 날에 맞춰 선포될 예정이다. 문 위원장은 "더 많은 시민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 권역별 토론회(9월 30일, 10월 17일)와 인권콘서트(11월 1일) 등을 진행하기로 했다"며 "많은 분들이 참여해 의견을 적극 주셨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지난 9월 30일 문 위원장과 나눈 일문일답.
"시민위원 토론 열기 '후끈'... 시간 제한할 정도"- 시민위원 150명 모집에 1570명이 지원했다. 이 정도로 경쟁이 치열할 거라 예상했나."전혀 예상 못했다. 사실 처음에는 걱정을 많이 했다. 시민들이 직접 처음부터 끝까지 인권헌장을 만드는 작업을 해보자는 취지로 시작했지만, 과연 지원자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1570명이 지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을 쓸어내렸다(웃음)."
- 시민위원들은 어떻게 구성됐나."시민위원들의 직업이나 사상 등은 전혀 모른다. 모집단계에서부터 인적사항을 제출받지 않았다. 인권헌장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굳이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시민위원은 25개 구청별, 성별, 연령대별로 지원자를 나눠 추첨해 선발했다.
이후 회의를 본격 진행하면서 '다양한 생각을 지닌 시민들이 모였다'는 걸 느꼈다. 서울시 안에서 집회와 표현의 자유가 보장돼야 한다는 분이 있는 반면, 서울광장에서 빈번하게 열리는 집회에 피로감을 나타내는 분도 있었다. 그만큼 다양한 서울시민들이 의견을 조율해가며 인권헌장을 만들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 시민이 직접 만드는 인권헌장을 기획한 이유가 있나."인권이란 권리는 본인이 주장하며 찾을 때 주어진다. 인권의 팬더 원칙(PANTHER. 인권에 기반을 둔 개발을 위해 지켜야 할 점. ▲ 참여 ▲ 책무성 ▲ 무차별 ▲ 투명성 ▲ 인간존엄 ▲ 자력화 ▲ 법의 지배 등 7가지다 - 기자 주) 중에서도 '참여(participation)'가 기본정신이다. 서울시 인권헌장을 만든다면 당연히 시민이 직접 참여해 만들어야 한다.
보통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정책을 다 만든 뒤에 한두 차례 공청회를 열고나서는 '시민 의견을 들었다'고 한다. 과연 이런 방식을 통해 시민의 의견이 얼마나 반영될까 싶다. 정말 서울시민의 생각이 들어간 헌장이 나오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시민의 손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이같은 이유에서 인권헌장을 시민 참여로 제정하자고 서울시에 제안했고, 고맙게도 시에서 받아들여줬다."
- 인권헌장 제정은 어떤 식으로 진행되나."올해 초 서울시 인권위원들이 준비한 기초자료를 가지고 8월부터 시민위원회 운영이 시작됐다. 회의는 서울시청 다목적홀에 테이블을 12개정도 마련해서 진행한다. 한 테이블 당 10명씩 앉아 2~3시간 동안 토론한다. 전문가들은 회의를 주도하지 않는다. 시민들이 의견을 다양하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촉진하는 역할만 한다. '인권과 사익이 어떻게 다른지 구별하기 어렵다'는 시민위원들의 요청에 따라 기초 인권교육도 병행했다.
사실 처음에는 '비전문가인 시민들이 기본적인 인권 원칙을 헌장에 잘 구현할 수 있을까', '어려운 주제를 두고 짧은 시간 안에 토론이 될까'라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3차례를 걸쳐 시민위원회를 진행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다들 정말 잘하신다. 인권헌장을 주제로 의견이 다양하게 만발한다. 발언 경쟁이 치열해 시민위원 모두 골고루 이야기할 수 있도록 발언시간과 횟수 등을 제한하면서 운영할 정도다.
토론 내용뿐만 아니라 절차적으로도 인권적이고 민주적이다. 가끔 반인권적 발언이 나올 때도 있지만, 그때마다 같은 팀 시민위원들이 반론하면서 의견이 자연스럽게 조정된다. 시민이 주인이 되면 이렇게 대단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거구나 싶었다. 매순간 감동이었다."
성소수자 지지자만 모였다? "적극 반대하는 분도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