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시탕의 십자가와 오성홍기.
김소연
나: 졸업설계를 성당으로 하고 싶다고? 넌 종교가 있니?W: 아뇨.나: 그럼 성당에서 어떤 활동이 일어나는지, 그래서 어떤 공간이 필요한지 알고 있어? W: 나는 성당의 특별한 분위기가 좋아요. 그곳에 사람들이 모여서 다양한 행사도 하고, 결혼식도 하고....나: 미사는? 고해는? 사제관은? 그런 걸 본 적이 있어?W: 아뇨. 결혼식은 본 적이 있는데....자유주제인 졸업설계에서 대부분의 학생들은 멀티콤플렉스나 커뮤니티 센터, 복합문화시설을 했다. 그런데 W는 건축학과 5년 동안 한 번도 다뤄본 적이 없는 성당을 하겠단다. 게다가 입으로는 성당이라 말하고 머리로는 이벤트 공간을 그리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집회시설이라는 공통점은 있다. 하지만 집회의 목적이나 내용이 다르다. 성당 분위기의 예식장과 성당은 엄연히 다르다.
중국어로 성당은 천주교당(天主教堂), 이미 그 말 속에 사전적인 의미가 분명한데도 W에겐 생활에서 경험한 의미가 먼저였다. 처음엔 어이가 없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중국에서라면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칭다오 구시가지만 해도 독일점령기에 세워진 기독교당(1908~1910)과 국민당 통치기의 천주교당(1930~1934) 앞은 언제나 결혼사진 촬영으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대신 본당 출입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중국은 종교가 자유로운 국가... 단 포교 발각되면 추방"내가 여행을 다녀본 다른 지역도 별반 차이는 없었다. 고풍스런 성당의 첨탑과 십자가 아래에서 낮에는 웨딩드레스와 턱시도를 입은 젊은 남녀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밤에는 중년들이 몰려 나와 요란한 음악을 틀어놓고 사교춤을 추었다. 그럴만한 광장이 없는 성당이라면 아예 입구에 철문이 막고 서 있었다. 심지어 성당 입구 벽면에 결혼식 광고와 전화번호가 인쇄된 현수막이 걸려 있는 곳도 있었다. 그런 장면을 사회주의 중국에서 일상적으로 봐온 사람이라면, W처럼 성당을 경건한 장소보다는 활기 넘치는 이벤트 공간으로 먼저 떠올릴 것이다.
"중국은 종교가 자유로운 국가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종교를 존중합니다. 중국에서 여러분은 성당이든 교회든 마음대로 다녀도 됩니다. 단, 중국인에게 포교를 해서는 안 됩니다. 발각되면 여러분은 추방됩니다. 추방되면, 다시는 중국에 올 수 없습니다." 내가 잠시 칭화대학교에서 중국어를 배울 때 오리엔테이션에서 학교 관계자가 했던 말이다. 사회주의 국가 중국이 종교를 허용한다고? 그들이 타도하려 했던 '인민의 아편'을 존중한다고? 그러면서도 포교는 안 된다? 추방에 재입국이 안 될 정도면 엄청난 죄라는 말인데 앞뒤가 맞는 이야기인가?
실제로 중국 헌법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하지만 종교 활동은 정부가 통제와 관리를 한다. 특히 외세의 간섭을 철저히 배격한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사회주의 관점에서 보면 교회는 토지를 소유해 왔기 때문에 계급투쟁의 대상인 대지주나 다름이 없고 성직자는 반공주의자이다. 여기에 서구 열강이 중국을 침략했을 때 서양의 종교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앞잡이 역할을 했던 사례도 한몫을 한다.
그래서 중국 정부는 1950년 삼자애국운동(三自爱国运动)을 제창하고 종교 강령으로 삼았다. 삼자(三自)란 스스로 교회를 다스린다는 '자치(自治)', 경제적인 자립을 의미하는 '자양(自養)', 중국인 스스로 복음을 전파한다는 '자전(自傳)'을 말한다. 당시 정부는 '자전(自傳)'을 빌미로 외국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자치(自治)'를 내세워 종교별 애국회를 설립하였다. 1957년에 정부 주도로 세워진 '중국 천주교 애국회'의 선언문을 보면 애국회의 정체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바티칸은 미제국주의와 자본주의 세계를 위하여 일하며 사회주의 제도를 원수로 여긴다. 따라서 바티칸에서 오는 명령은 그것이 정치적인 것인지 종교적인 것인지 분명하게 구분해야 하며, 종교 형식으로 나타나지만 실제로는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그런 명령을 우리는 받아들일 수 없다… 애국은 천직이므로 (바티칸을 포함해) 어떤 사람이라도 우리나라를 반대하면 우리도 그를 반대할 것이다." (출처: 김원철, "애국회, 불가피한 역사적 산물인가?", 평화신문, 2008. 11. 30)그 후 중국은 교황의 고유 권한인 주교 임명권을 스스로 행사하면서 바티칸과 결별하게 되었다. 정부와 애국회의 방침을 거부한 성직자들은 감옥이나 사상노동개조 수용소로 끌려가고, 신자들은 지하로 숨어들어 '가정교회' 형태로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문화대혁명 때는 그마저도 불가능했고 애국회 활동도 중단되었다. 개혁개방이 되고서야 종교인들이 석방되고 종교 활동도 서서히 살아났지만, 어디까지나 재건된 애국회 테두리 안에서 허용되었다. 중국은 여전히 스스로 주교를 선출한다. 그 한계 때문에 중국 정부와 바티칸의 관계는 진전이 없다.
중국의 기독교 신자 수, 중국 정부가 긴장할 만하다간혹 중국 뉴스를 보면 '애국교회'니 '지하교회'니 하는 말이 나온다. 종교탄압 기사에는 어김없이 '지하교회'나 '가정교회'가 따라 다닌다. 그 차이가 뭘까? 중국에서는 모든 예배장소를 정부에 등록해야 한다. 애국교회는 등록된 공식 교회이고, 지하교회는 등록되지 않은 비공식 교회다. 비공식 교회는 정부와 애국회의 방침을 거부한다.
2013년 3월 22일 <연합뉴스>에 의하면 중국 관제 교회 소속 신자는 약 1800만 명에서 3천만 명이고, 가정교회(지하교회, 지하성당)에 다니는 신자는 4500만 명에서 6천여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등록 신자보다 미등록 신자가 더 많은 셈이다. 어쨌든 그 둘을 합치면 총 신자수는 6300만 명에서 9천만 명이다. 그런데 중국 공산당원은 8천만 명이다.
기독교 신자 수뿐만 아니라 중국에 입국하는 외국인 수, 그들과 중국인들의 경제 문화적인 교류와 SNS의 파급력을 고려하면 중국 정부가 긴장할 만하다. 글로벌 시대에 애국을 전제로 한 자치, 자양, 자전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내가 칭다오에서 목격한 외국인의 종교 활동은 두 종류였다. 개신교 신자였던 미국인은 가정교회에 다닌다고 했다. 그녀는 시내 식당에서 스스럼없이 식사 전 기도를 올렸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녀는 온갖 화제로 수다를 떨면서도 종교 이야기만큼은 입을 다물었다. 중국에서 10년을 산 그녀를 보면서 나는 새삼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는 속담의 무게를 느꼈다.
그런데 한국인은 좀 달랐다. '교회 오세요, 성당 오세요' 스스럼없이 권했다. 한국인끼리이니 중국인에 대한 포교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들은 가정교회 신자들이 아니었다. 칭다오에는 장로교, 감리교 등 여러 교파가 있고, 바자회도 공개적으로 열렸다. 어떤 교회는 차량을 운행할 만큼 규모가 있고 운영도 안정적이었다.
순복음교회는 칭다오 시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존재감을 드러냈다. 가톨릭 신자들은 칭다오의 역사 보존 건축인 천주교당에서 주일마다 한국어 미사를 가졌다. 표 나지 않게 가정교회에 다니는 다른 외국인과 달랐다. 그 차이점에 대하여 한 외국인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지난 20년간 칭다오는 중국에서 한국기업이 가장 많이 진출한 곳이야. 지금은 이런 저런 규제로 한국 기업이 떠나고 있지만, 한국에 대한 경제적인 필요성은 여전할 거야. 그러니 칭다오 정부는 그 목적 때문에라도 한국인의 종교 활동을 덜 압박하겠지. 또 하나, 물론 이건 나의 편견일 수도 있겠지만, 한국인은 절실함과 진지함보다는 친목단체처럼 교회 활동을 하는 것 같아. 어쩌면 중국 정부가 볼 때 이런 모습이 덜 위험하게 보일 거야." '나이롱 신자'가 많다고 꼬집는 걸까. 드러내놓고 활동하는 한국 교회는 중국의 관제 시스템에 포섭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걸까. 당시 나는 어느 종교 단체와도 교류가 없었던 터라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었다. 가끔은 밖에서 보는 나의 눈에도 몇몇 한국인의 종교 활동이 이익단체나 사교클럽처럼 보일 때가 있긴 했다. 하지만 외국이라면 좀 특수한 상황이 아닐까. 낯선 타국에서 저 높은 곳만 우러러 볼 것이 아니라 서로 옆에서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외로움을 달래는 것도 이웃 사랑일 테니까.
그렇다고 해서 모든 한국인 신자들이 중국 정부가 정한 틀 안에서 공개적인 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외신의 외국인 선교사가 잡혀갔다는 소식에 가정교회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선교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문이 늘 잠겨 있는 예배당... 베이탕 본당 꽉 채운 중국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