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봄, 우리는 세월호 사건을 통해 한 사회의 문화가 생명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음을 보았습니다. 무고한 생명을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을 우리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새들마을학교'는 배우고 가르치는 일, 즉 교육이 이 사회의 문화를 낳았다고 생각합니다. 교육과 배움으로 바른 문화를 만들기 원하는 이들이 모여 '생명을 살리는 교육'을 고민하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열린도시연구소 새 들'과 산하 '새들마을학교'는 '생명의 교육, 길을 찾아서'라는 주제로 '고뇌와 축제로 펼치는 교육문화연구학교'를 10월 9일부터 12월 25일까지 12회 진행합니다. 이를 계속 연재합니다. - 기자말
나는 선생님이다. 안양 비산동 관악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초중고 통합 교과과정 학교인 새들마을학교에서 23명의 아이들과 함께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해진 시대,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무색해지고 친구 관계가 파괴되어 가는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는 참된 문화와 교육을 소망하며 선생님이 되었다.
우리 학교에서는 늘 변화가 일어난다. 선생님으로 보낸 2년의 시간 동안 수도 없이 많은 변화 앞에 서야 했다. 학생들뿐 아니라 선생님도 끊임없이 변화의 요청을 받게 된다. 오래도록 나쁘게 굳어진 자신의 삶을 옳게 변화시키는 것이 교육의 결실이라고 했을 때 우리학교는 충실하게 열매를 맺고 있다.
다만 서로를 깊이 사랑하고 서로의 삶을 면밀히 살피고 함께 살고자 하는 서로가 서로에게 옳은 변화의 길로 요청한다. 이것이 우리 학교의 문화이다. 서로 경쟁하고 헐뜯고 내리깎는 것이 아닌 서로를 사랑하고 돕고 살리는 문화다. 이런 문화에서는 실로 놀라운 일들이 쉽게 일어난다. 배움이 가능하다. 변화가 일어난다.
<두려움과 배움은 함께 춤출 수 없다> 책을 읽고 함께 토론
새들마을학교에서는 참교육을 고민하고 지혜를 나누고자 교육문화연구학교 '생명의 교육, 길을 찾아서'를 열었다. 다섯 번째 시간은 <두려움과 배움은 함께 춤출 수 없다> 책을 읽고 함께 토론하는 자리였다.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다양한 상처를 가진 아이들을 만나며 그들의 고유성과 자유를 지켜 주기 위해 노력했던 교사들의 모습이다.
토론하는 자리에서도 무마사토를 만났던 선생님들의 노력이 주로 이야기되었다. 나는 이 내용을 새들마을학교 교사의 경험을 통해 이해한 것을 바탕으로 다시 이야기해 보려 한다.
무마사토의 아버지는 일 년에 한두 번 잠깐 아이들을 보러 오는 형편이었다. 어머니는 유능한 여성이었지만, 결핍과 빈곤 속에서 열 명이나 되는 자녀를 어렵게 키워야 했다. 무마사토는 그중 아홉째였는데 진정한 인간관계가 부족한 가운데 자랐기에 언제나 관심을 끌려고 부정적인 행동을 했다.
일단 분노가 폭발하게 되면 자신의 에너지를 스스로 조절할 수 없고 갓 태어난 아기처럼 악을 쓰고 화를 내거나 혹은 손톱으로 할퀴거나 입으로 물어뜯었다. 심리학자나 정신과 의사가 그 아이를 봤다면 대번 주의력결핍장애와 행동과다인 ADHD로 진단했을 것이다.
책의 저자인 크리스 메르코글리아노는 그것이 미리 짜인 표준 속에 아이들을 맞추고자 하는 사회요구적 진단이라고 일축하고 무마사토는 독특한 발전 궤도를 가지고 있는 친구일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넘치는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을 아이 고유의 모습이 약간 뒤틀린 것이라 본다.
아이의 고유성과 자유 그리고 아이의 독특한 발전시간표를 참고 견디며 관대하게 봐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때문에 아이에게 필요한 적절한 교육은 그 안에 넘치는 분노와 에너지를 강압적으로 막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게 소모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식이다. 이처럼 크리스는 주도면밀한 관찰로 아이의 고유성과 자유를 확립시켜 주고 아이의 속도를 기다려 주는 방법으로 아이들을 만나러 간다.
"책을 보면서 크리스가 무마사토를 만나는 모습이 인상 깊었습니다. 거기서 한 존재를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선생님의 열망을 보게 되었습니다. 결국 한 사람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한 참석자의 말이다. 한국의 특수한 교육적 상황 속에서 자란 참석자들에게 크리스가 무마사토를 만나는 모습은 이전까지 경험하지 못한 참신한 교육 방식으로 인식됐다. 강압과 경쟁, 두려움과 입시의 압박 속에서 자유, 고유성, 아이의 속도라는 말은 포성 속에 피어난 한 줄기 꽃과 같이 다가온다.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맺고 살아가기
그런데 이렇게 한 아이의 자유실현과 고유성을 키워 주는 것만을 획일적으로 가져 가게 될 때 모순이 발생한다. 한 아이의 자유와 또 다른 아이의 자유가 충돌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개인이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맺고 살아가고 있으며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저자인 크리스 역시 후에 그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또 한 참가자는 이렇게 말했다.
"개인의 시간표를 존중해 주는 것, 고유성을 인정해 주는 것, 아이의 속도를 기다려 주는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혹 제가 그렇게 교육을 받았다면 어땠을지 생각해 봅니다. 빼앗긴 저만의 고유성은 무엇일까요? 저는 남들보다 도태될 것에 대한 두려움이 늘 있었습니다. '그 힘으로 늘 배우다가 문득 이렇게 살아서 행복할까?'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관계가 상실된 채로 배움이 된다는 것이 결국 두려움을 일으키고 배움의 본질을 잃게 하는 것입니다."
한 아이를 향한 깊은 애정과 사랑, 그리고 아이의 고유한 모습 속에 들어 있는 창조적 아름다움을 믿는 행위로서의 크리스의 방법은 탁월하다. 그러나 크리스는 철저히 미국의 자유주의적 철학에 기반하여 아이를 만나고 있다고 최봉실 새들마을학교 교장은 지적한다. (관련기사 : 10남매 중 9번째, 애정결핍 이 아이가 달라진 힘)
미국의 자유주의적 철학이 만들어 낸 개인의 존엄과 자유라는 가치는 타인을 배제할 수 있는 맹점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소중하고 나의 자유가 지켜지고 나의 고유성만이 소중해야 하는 그 기치 아래 철저하게 타인이 배제되는 일이 빈번하기 때문이다. 무마사토 역시 본인이 내키거나 호기심이 일 때는 친구들과 곧잘 놀고 교육 과정의 참여도가 좋았지만, 본인이 내키지 않는 순간 자기 하고 싶은 대로 공격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따라서 개인의 존엄과 자유가 지켜져야 한다는 지점은 분명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나 개인의 존엄과 자유가 중요한 만큼 타인의 존엄과 자유도 동일하게 인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만 존중받아서는 안 되고 타인을 인식하고 타인에 대한 감수성을 가지게 하는 교육이 또한 필요하다.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관계와 상황이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지 않으면 그만큼 타인이 힘들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한다.
"훈육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체벌의 의미로 이해되지만 참된 훈육이란 몸을 단련시키고, 자기를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습득하게 하는 것. 이를 위해 때론 하기 싫어도 참고 해 내도록 도와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최봉실 새들마을학교 교장)
이러한 훈육은 전자의 깊은 애정과 사랑을 가지고 관찰하고 자유를 지켜주는 교육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아이를 향한 깊은 사랑과 신뢰를 기반으로 아이의 상황과 맥락에 따라 균형 있게, 조화롭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모둠에 참여했던 한 이는 균형 있게 아이를 교육하고 싶은 마음을 이야기하면서 새로운 세상과 문화를 꿈꿨다.
"저는 어릴 적 굉장히 체제순응적인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내 아이만큼은 자유분방하게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 자유분방함도 내가 수용하고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길 바라는 마음이 동시에 있습니다. 결국 내 아이가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려면 내가 새로운 세상을 보여줘야 하고 새로운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충돌 없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올바른 문화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 필요하다. 각자의 자유와 존엄이 침해되지 않으면서도 타인을 향한 존중이 동시에 일어날 수 있는 문화, 나를 잃지 않으면서도 너를 받아들일 수 있는 문화, 너와 내가 서로 공존하고 상생할 수 있는 문화가 있어야 총체적이며 유기적이며 두 가지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살아있는 교육이 가능하리라 본다.
그것이 없이 한쪽으로만 치우칠 때 아이는 두려움으로 자기의 고유한 가치를 잃거나 혹은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르는 이기적인 아이로 자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는 관계가 확보되어 있어야 가능할 것이다. 모둠 참여자들도 관계를 주요하게 이야기하였다.
"저도 어릴 적 쉽게 분노하고 꾹 참고 폭발하는 성향의 아이였습니다. 쉽게 포기되지 않는 공격성이 결국 관계 안에서 해결될 수 있음을 경험하는 것 같습니다."
함께 있는 타인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이 이질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문화, 경쟁하고 깎아 내리는 문화가 아닌 돕고 상생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우리의 생각보다 아이들의 생명력은 강하다. 그리고 선하다. 옳고 그른 것이 무엇인지 알고 모두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다.
자기 중심성에 굳어진 친구들...
아이들을 가르치며 발견하게 된 것은 아이들 사이에 건강하고 선한 문화가 중심을 잡고 있을 때 그릇되고 이기적인 문화에 익숙한 친구들이 기꺼이 변화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자기 중심성에 굳어진 친구들에게는 이렇게 거듭 타인을 생각하게 하는 문화가 낯설고 힘들 수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진정 이 문화가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좋은 것이라 깨닫게 된다.
배움은 철저하게 이러한 관계성 속에서만 가능하다. 이런 문화는 두려움이 이길 수 없는 깊은 생명의 빛과 같다. 함께 걸어 주고, 돕고, 배우고 배워 주는 관계가 있기 때문에 두려움이 들어올 틈이 없다. 두려움을 이기는 관계가 있기에 배움의 속도도 빠르다.
"옳지 못한 행동, 즉 타인에 대해 무감한 행동은 즉각 교정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아요. 바른 관계와 문화가 형성되어 있어야만 자기중심적이고 공격적인 사람을 잘 만날 수 있고 배움에도 잘 임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새들마을학교에 다니고 있는 한 친구의 이야기다.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두려움 그리고 두려움이 자아내는 공격성이 상쇄될 수 있는 관계가 허락될 때만이 참교육은 가능하다. 학교에 처음 오는 친구들이 배움 앞에 머뭇거리는 가장 큰 이유는 두려움이 억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하면 저 친구는 어떻게 생각할까?", "저 친구가 내 수준을 보고 비웃지 않을까?", "나는 저 친구보다 못하는데 어쩌지?"
서로 돕고 상생하는 문화가 익숙해진 친구들은 아무도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배움에 임하며 내가 못하는 그것을 새로운 도전의 기회로 삼고 참배움 앞에 서고자 한다. 그러나 경쟁이 익숙하고 서로 깔고 뭉개는 것이 익숙한 친구들은 두려움에 잠식되어 배움 앞에 머뭇거리게 된다. 그리고 결국 지지 않기 위해 공격적, 폭력적이 되거나 수동적으로 위축되거나 한다. 그만큼 문화가 중요한 것이다.
내가 용납되고 사랑받는 경험을 하는 것 그리고 동일하게 내게 다가오는 타인을 용납하고 사랑해 보는 경험이 참된 배움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렇게 축적된 관계가 내게 두려움이 아닌 행복과 즐거움이 되어 참된 배움의 길을 걷는데 힘이 되어준다.
나와 타인, 자유와 질서, 홀로서기와 연대하기가 균형 있게 이루어지는 문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참교육이 대한민국 사회에 가득해지길 바란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학교 친구들과 행복하지만 뜨겁고 치열하게 만나간다. 나는 선생님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