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촌동의 술집들은 피란 예술인들의 애환을 달래주면서 지방도시에 예술을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장호철
지역 문화가 성장한 텃밭 향촌동그러나 창구의 자원봉사자로부터 받은 안내전단을 들고 문화관 첫 전시실을 다 둘러보기도 전에 내가 알던 향촌동은 그것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향촌동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7, 80년대에 반짝 번성한 한갓진 유흥가가 아니었다. 향촌동은 해방 이후 우리 현대사를 품고 있는 공간이었고, 그것을 통해 지역의 문화가 성장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향촌동은 일제 강점기 때에 촌상정(村上町)이라 불렸던 동네다. 1946년부터 향촌동으로 불리게 된 것은 이 동네가 '향기롭고 가장 많이 변화한 곳'이라는 뜻에서였다고 한다.(대구 지명 유래) 동네의 북쪽을 태평로가 동서로 가로지르고 그 위는 경부선 철도다. 동쪽에 중앙로가 남북 방향으로 지나가는데 그 길 북쪽을 막아선 복합 건물이 민자 대구 역사다.
뜻과는 달리 다소 천박하게 쓰이는 '향기 향(香)'자를 쓰고 있지만 원래 향촌동은 경상 감영의 화약고가 있었던 곳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부근에 중앙 염매소가 있었는데, 이곳은 오늘날 중앙시장의 기원이 되었다. 향촌동은 대구역이 들어서고 읍성이 헐리면서 도심의 새로운 중심으로 떠올랐다고 한다.
향촌동, 피난 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향촌동은 해방 5년 만에 일어난 한국전쟁의 생생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서울 함락 이후 대구로 내려온 문인들이 향촌동의 다방에 머물면서 원고를 썼고, 그 원고료로 막걸릿집을 주유했다. 문인 뿐 아니라 음악가, 연극영화인, 화가들이 어울려 후방의 문화 예술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전쟁은 그들 피란 문화 예술인을 통해 한갓진 지방 도시에 예술의 활력을 불어넣었다. 다방과 음악 감상실에서 그들이 나눈 대화가 노래가 곧 시와 음악이 되었던 것이다. 음악가 김동진, 나운영, 연극 영화인 신상옥과 최은희, 화가 권옥연, 김환기, 이중섭 같은 이들이 그들이었다.
한국전쟁과 함께 피란 문단이 형성된 향촌동에는 5, 60년대를 풍미한 시인 묵객들의 발자취가 선연했다. 피란 문인들이 날마다 모였던 음악 감상실 르네상스, 구상 시인이 단골로 묵었던 화월여관, 이중섭은 담배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던 백록다방 등이 그것이었다. 향촌동은 이들 문화 예술인들이 전쟁의 후유증 속에 삶의 고뇌와 문학과 예술에 대한 꿈과 함께 실향과 이산의 아픔을 나누던 곳이었다.
그예 향촌동은 피란 온 문화 예술인들의 아지트요, 대중 예술의 요람이 되었다. 이 시기의 대구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극영화 제작이 유지된 한국 영화 현장의 중심이었고, 대구의 오리엔트레코드사가 한국가요의 맥을 잇고 있었던 것이다.
향촌문화관은 이러한 내력의 공간, 그 역사성을 중심으로 향촌동의 역사와 그 의미를 환기하고 있다. 문화관은 향촌동의 흥망성쇠를 연표와 사진, 영상자료로 표현하는 한편 실감 나는 모형과 배경 그림을 통해 중앙로와 북성로 공구 골목, 대구역, 교동시장 따위의 주요 공간을 재현하고 있다.
나는 중앙통 부근의 거리로 재현된 명통구리 양복점과 애안당 따위의 오래되거나 지금은 사라진 점포들 앞에서 문득 시간여행을 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입장객들을 4, 50여 년 전의 시간으로 되돌려 주고 있는 것 같았다.
향촌문화관의 3, 4층은 대구문학관으로, 일제강점기와 1950년대 전후 문학을 꽃 피워낸 1, 2세대 작가들의 흔적을 중심으로 대구 문학의 역사와 얼개를 전시하고 있다. 그러나 대구문학관은 굳이 향촌문화관과 나누어 이해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왜냐하면 향촌동의 역사와 대구 문학은 매우 긴밀히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향촌동의 다방과 술집에서 포효하던 문인들이 곧 대구 문학의 주역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