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주 선생님 강연 장면-2첫눈이 내린 추운 날씨에도 많은 분들이 참석해서 김영주 선생님의 협동조합 이야기를 듣고 있다.
이정혁
그리고나서, 지학순 주교님과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만남에서부터 협동조합 운동을 진행하는 과정 등의 다양한 일화들이 소개되었다. 군사정권의 가혹한 탄압아래에서도 평양 출신의 젊은 주교와 원주 출신의 피끓는 청년은 운명처럼 만났고 서로를 알아보았다. 로마 교황청에 유학 가서 이탈리아의 협동조합을 직접 목격한 지학순 주교의 눈에, 진취적이고 인간적인 장일순 선생이 눈에 띄인 것이다.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평화통일을 주장하다가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8년형을 선고받고 3년간 옥살이를 했던 장일순 선생. 그는 교도관의 검열을 피해서 진보적인 서적을 읽으려고 모든 책을 외국의 원서로 구해서 읽었다고 한다. 그의 진보적인 사상은 역설적이게도 독재정권의 옥살이 중에 다듬어져 완성된 것이다.
그렇게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원주에 카톨릭센터를 설립하고, 그때부터 사회 활동을 시작한다. 교회 일치 운동을 시작으로 원주지역의 종교계를 묶어내고, 낙태 반대 등의 생명운동과 협동조직운동을 전개한다. 원주 협동조합의 기틀이 다져지는 순간이었다. 김영주 선생의 역할은 그 당시부터 실무적인 일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삥땅 심포지움'이 열리게 된 계기당시의 여러 에피소드를 말씀해 주셨지만, 그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한 가지만 지면으로 옮겨본다. 이름하여, '삥땅 심포지엄'. 요즘은 볼 수 없지만, 내가 어릴 적 만해도 버스안내양(여차장)이라 불리는 소녀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시골에서 도시로 돈 벌러 나와 집안 생활비와 동생들의 학비를 대야했던 소녀 가장들이었다. 70년대에 새벽 4시부터 밤 12시까지 일하고 그들이 받는 일당은 고작 540원(1977년 기준). '삥땅'이라는 부수입이 없다면, 딸린 식솔들을 책임지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러한 소녀들 중 한 소녀의 이야기다. 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인 삥땅을 챙기던 그녀는 어느 순간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그런 삥땅이 없으면 동생들 학비며 부모님 치료비가 턱없이 부족하고, 그렇다고 계속하는 건 일종의 도둑질이었으므로 혼란에 빠진 것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소녀는 용기를 내어 서울의 한 교회에 편지를 쓴다. 이러이러한 상황인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하지만, 그 교회의 목사는 섣불리 답을 주지 못했다. 그리고 그 편지의 내용은 서울 시내의 교회와 성당등지로 순식간에 퍼지게 된다. 수많은 목사와 신부들이 또렷한 답변을 찾지 못하는 상황속에서 원주교구의 지학순 주교에게도 전달되었다. 그리고, 지학순 주교는 누구보다 명쾌하고 확실한 답을 내리게 된다.
"버스회사 과장님, 시청 교통과장님, 경찰서장님, 그리고 장관님들. 여러분들은 월급만 가지고 생활할 수 있습니까? 아니, 그렇게 생활하십니까? 이 소녀에게 도둑질을 했다고 욕할 수 있는 분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지학순 주교가 지적한 전 국가적인 부패의 문제는 당시로써는 함부로 언급해선 안될 사안이었으며, 목숨을 걸만한 용기가 필요한 것이었다.
지학순 주교는 한 발 더 나아가 이 문제를 공론화하기 위한 심포지움을 개최한다. 1970년 4월 28일. 서울 종로 YMCA 에서 열린 삥땅 심포지움이 바로 그것이다. 이 심포지움을 통해 당시 버스 안내양들의 열악한 근무조건이 소상히 공개되었으며, 그로 인해 생존권과 관련된 의식이 깨우쳐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후 생존권에 관한 문제는 농민들에게 쌀 생산비 조사와 노동자들의 월 생계비 조사운동으로 확산된다. 최저 생활비를 위한 생존권 보장 운동의 불길이 타오르게 된 것이다.
이외에도 1973년에 시작된 부락개발사업의 송아지 분배이야기와 1975년 국내 최초로 유기농 생산운동을 전개할 때의 이야기 등을 구수한 옛날이야기처럼 한 보따리 풀어놓으셨다. 그리고 강의의 마지막에 정리해주신 말씀은 지금껏 내가 이해하던 협동조합의 가치를 근본에서부터 고민하게 만들고 말았다.
협동조합은 잃어버린 이웃을 찾는 운동이고, 이는 결국 진정한 인간화의 과정이며, 상생의 원리를 통해 결국에는 생명의 존엄에 다가가는 운동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협동조합은 바로 생명이라는 것이다. 협동조합을 단순히 착한 기업의 시각에서 풀어보려던 나에게 일침이 가해지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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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위주로 어줍지 않은 솜씨지만 몇자 적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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