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는 날의 우편배달부

정성이 넘치는 여유있는 사람

등록 2014.12.11 15:34수정 2014.12.11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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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오'는 어부의 아들이었다. 남미 칠레의 한적한 섬에서 태어나고 그 섬에서만 살다보니 변화가 없는 섬 생활을 따분해 하다가 이 섬으로 유배를 온 '네루다'라는 체코의 유명한 시인을 만나 그의 전속 우편배달부가 된다. 그리고는 그의 삶이 송두리째 바뀐다. <일 포스티노>라는 영화 이야기다.


영화 같은 이야기는 현실 속에도 있기 마련이다. 직업으로서의 우편배달부가 우편물만 배달하지 않고 '마리오'처럼 우편물을 주고받는 사람에 관심 갖기는 쉽지 않다. 제 시간에 갖다 줘야 할 우편물이 그럴 틈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편지와 각종 고지서, 신문이나 소포가 늘 가방에 넘친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오토바이 위에서 곡예를 한다. 시골길 흙탕물이 빨간색 오토바이를 전혀 다른 색깔로 바꿔 놓기도 한다. '일 포스티노'의 우편배달부와는 다르지만 우리 마을에도 특별한 우체부가 있다.

월요일인 그제(12월 8일)는 비가 아니라 눈이 왔다. 연 사흘째 내리는 눈이 얼어 길이 빙판이었다. 기대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대문간으로 우체부가 들어오기에 깜짝 놀랐다. 오토바이는 안 보였다. 그가 눈길을 뚫고 우리 집까지 온 이유는 전해야 할 우편물 외에 다른 게 있었다.

오늘처럼 눈이 많이 오는 날에는 마을 입구에 있는 농장 창고에 우편물을 둬도 좋겠냐고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이 말을 작년에도 했고 재작년에도 했다. 나는 재작년에도 그랬지만 작년에도 당연히 그렇게 하시라고 했었다. 그런데도 올해 또 그 말을 하러 오토바이를 길에 세워두고 눈길을 수백 미터 걸어서 올라 온 것이다.

내가 집에 없을 때 등기라도 오면 굳이 전화를 하시는 분이다. 어디에 두고 가니까 돌아오면 확인하라는 전화다. 전화 안 해도 되니까 앞으로는 그냥 두고 가시라고 해도 등기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며 꼭 전화를 한다.

그 손 전화기를 이렇게 눈이 오는 날에 쓰면 좋으련만 일부러 올라왔었다. 올 겨울 오토바이가 못 올라올 정도로 많은 눈은 처음이라 직접 와서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책이나 택배를 부치면서 요금을 드리면 다음날 잔돈을 안 빠뜨리고 작은 비닐봉지에 영수증과 함께 가져온다. 요금을 치르고 남은 돈을 갖다 주는 건 누구나 당연하다고 여길 것이다. 우리 동네 우체부가 특별하다는 것은 반대의 경우에 있어서다.

우체국에 가서 정산을 했는데 내가 드린 요금이 모자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집으로 들어오지 않고 영수증만 편지나 신문 사이에 끼워서 대문 밖 우체통에 놓고 간다. 바빠서 그렇단다. 잔돈을 갖다 줄때는 꼭 집으로 들어오는데 말이다. 이럴 때면 나는 모자라는 잔돈을 예의 작은 비닐봉지에 담아 우체통에 넣어 두지만 어떤 때는 내가 깜빡하고 그냥 지나간 것이 서너 건은 되어 함께 드리려고 총액을 물으면 그는 기억을 못한다. 내게 전해 줘야 할 우편물과 잔돈은 잊은 적이 없는 그가 자기 돈으로 메운 돈은 잘 잊는다.

나는 그 우체부가 어떤 계기가 있어서 우편물 하나하나를 그렇게 소중하게 대하고 고객(?)을 정성으로 섬기는지 알지 못한다. 바쁠텐데도 마주치면 꼭 오토바이를 세우고 읍내 이야기를 전해 주기도 하고 일상의 안부를 물어 오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마리오' 못지않게 새로운 삶을 만났고 즐거워 한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계간 문예지인 <창비>가 올 때가 되었다고 하거나 치매를 앓는 어머니 기저귀 아직 안 떨어졌냐면서 택배 올 때 되지 않았냐고 물어 올 때 보면 그렇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불교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우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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