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은 화장터에서 시신을 화장하는 장작 쌓는 일을 하고 있었다.
송성영
노인이 짊어진 삶의 무게 때문이었을까. 갑자기 울음이 울컥 솟구쳤다.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나왔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노인 때문만은 아니었다. 시신을 태우기 위해 장작 쌓기를 반복하고 있는 노인의 발걸음, 그것은 내 삶의 여정이었다. 한낱 검게 타다 남은 숯 덩어리에 불과할 내 자신의 주검을 향해 고통이 반복되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아내와 끊임없는 다툼으로 내 가슴에는 사랑과 자비심보다는 증오심으로 들끓었다. 그 증오심은 여지없이 숨 막히는 고통으로 다가왔다. 나는 여전히 증오심과 고통을 털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서로 사랑하고 살기에도 부족한 삶을 왜 그토록 고통의 무게에 짓눌려 살아야 하는가. 장작불에 살이 타들어 가는 주검들은 그 부질없는 증오심, 뒤틀린 마음의 짐을 내려 놓으라 이르고 있었다.
장작을 짊어진 노인은 젊은 일꾼들 틈에서 흰 수염과 번쩍이는 눈빛으로 끊임없이 계단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고통이 반복되는 삶, 노인은 마치 끊임없이 반복되는 자신의 업을 불사르기 위해 장작더미를 쌓는 듯 보였다. 노인 또한 조만간 자신이 쌓고 있는 저 장작더미 위에 눕게 될 것이다. 어디 노인뿐이겠는가. 그 누구든 저 주검의 장작더미에서 벗어날 수 없다.
바라나시의 화장터를 둘러본 사람들 중에는 더러 인도의 가난한 사람들은 장작을 살 돈조차 없어 화장조차 제대로 못한다고 말한다. 부자로 살았던 사람들은 장작을 높게 쌓아 놓는다. 모두가 사실이다. 한국에서도 살아생전 큰 사찰을 거느린 스님들조차 보통 스님들보다 다비장이 더 호화롭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는 차별이 없다. 죽음 앞에서는 평등하다. 죽음 앞에 장작을 높이 쌓아 올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장작을 다 쌓은 노인은 다시 그늘막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맨 처음 만났을 때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몸 하나 바로 일으킬 수 없으리라 여겼던 노인이었다. 노인이 다가오는 순간 아, 내 입에서 짧은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힘든 노동일에서 돌아온 노인에게서 지친 표정은 물론이고 거친 호흡조차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노인이 돌아왔을 때, 길게 늘어진 땡볕이 내가 앉아 있던 그늘막 깊숙이 파고들어 끈적끈적하게 핥아 대고 있었다. 힘든 노동일에서 돌아온 노인이었지만 내게 자신의 그늘 자리를 양보하고 계단으로 내려선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냥 앉아 계세요.""......."노인은 예의 그 부드러운 손짓으로 거기 그냥 앉아 있으라고 한다. 마치 큰 스님이 동자승에게 자비를 베풀 듯이. 그러고 나서 노인은 아주 평화로운 얼굴로 땡볕 계단에 앉아 다시 화장터를 응시한다.
나는 땡볕에 앉아 있는 노인에게 너무나 미안해 재빨리 화장터 주변에 있는 가게로 달려갔다. 거기서 물 한 병을 사려다가 두 병을 샀다. 한 병만 사 오면 자리를 양보하듯, 노인이 거절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거 좀 마시세요. 저도 한 병 있습니다.""......."물병을 건네자 노인은 그마저 거절했다. 부드러운 손짓으로 빙그레 웃으며 자신의 물이 있으니 걱정 말라는 표정으로 손짓한다. 노인 옆에는 먹다 남은 아주 적은 양의 물병이 놓여 있었다. 노인의 얼굴에 여유와 평화가 넘쳐나고 있었다. 그 표정에서 보이지 않는 인도의 힘이 온몸으로 전해져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