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5 -팔미도의 밤->표지
한겨레출판
1950년 7월 23일 정오, 충북 영동군 황간면 임계리와 주곡리 마을에 미군의 소개 명령이 떨어졌다. 500여 명의 피난민이 명령을 받고 마을을 떠났다. 노숙을 하며 4번 국도를 따라 황간면 서송원리 부근에 도착한 그들은 미군의 유도로 국도에서 철도로 행로를 변경했다. 노근리에 당도한 26일 정오경 인솔하던 미군의 무전을 받고 비행기 한 대가 피난민들의 머리 위를 지났다. (5권 p7~9)갑자기 미군기에서 폭격과 기관총 소사가 시작됐고, 지상의 미군들은 폭격을 피해 개근 철교로 피신한 주민을 향해 1950년 7월 26일 오후부터 그해 7월 29일 오전까지 기관총과 박격포 사격을 전개했다. 약 4일간의 살육전으로 주민 3백여 명이 죽어갔다. 이상이 바로 북한의 소행으로 알려졌으나 이후 미군의 소행으로 밝혀진 '노근리 학살'의 실체다.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정부는 국민을 안심시키는 녹음방송을 틀어대며 피난 중이었고, 수많은 군중의 존재를 알면서도 다리를 폭파했다. 대부분의 국민이 '우리 편'으로 알고 있던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와 미군이 결코 대한민국 국민의 '편'만은 아니었다는 불편한 진실은 여전히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다.
대한민국 정부의 어제와 오늘북한의 남침, 미군과 UN군의 개입, 인천 상륙 작전으로 인한 서울 수복, 북진, 중공군 개입, 후퇴 등 일련의 과정에서 남한 정부가 한 일이라고는 한강 다리를 폭파하고 먼저 피난한 일 외엔 없다. 아니 더 있다. 북한군의 파죽지세에 놀란 이승만은 일본 야마구치 현에 망명 정부를 설치하는 방안을 계획하기도 했는데, 실제로 당시 일본은 야마구치 현의 지사 다나카에게 6만여 명을 수용할 시설 및 식량을 준비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저자 윤태호는 전쟁 중 국민의 마지막 피난처, 부산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대부분의 피난민들이 하루하루 연명하기 힘든 지경이다 보니 피난민들 사이에서 사기와 폭력, 강탈 등이 난무했고, 심지어는 몇 푼 때문에 살인이 저질러지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미군들과 고위층 인사들이 일명 '댄스홀'이라 불리는 무도회장에서 연일 음주가무로 밤을 지샌다. 여차하면 망명 정부로 튈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놓았으니 아무 걱정이 없었던 게다.
국민에게는 정부와 국군을 믿고 '가만 있으라'하고 대통령과 정, 재계 인사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신들만을 위한 세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이 부산의 댄스홀에서 술 마시며 춤추고, 너무 먹어서 토악질을 하고 있을 때, 철구네와 같은 힘없는 국민은 비참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크로마이트 작전으로 명명된 인천 상륙작전미 공군 폭격기대가 성진 금속공장에 폭탄 350톤, 진남포 공장지대에 폭탄 284톤, 극동공군 폭격기 550대가 북한군 기지에 폭탄 500톤, B-29 전폭기가 고성 철강공장에 폭탄 350톤을 투하했다. 또한, 오스트레일리아 공군, 미 제 5공군, 미 해병대 소속기 250대가 평양비행장 등을 폭격하는 등 하늘을 장악한 미군과 연합군에게 북한군은 속수무책이었다. (5권 p.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