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헌밥재판소에서 진행된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심판을 위해 재판관들이 입장해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지만, 필자는 진보적 민주주의는 통합진보당의 이념이라고 생각한다. 법무부의 정당해산 심판 청구서에도, 헌재 재판 과정에서도, 헌재 판결문에서도 진보적 민주주의가 가장 큰 영역을 차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진보적 민주주의에 대한 헌재의 판결은 "진보적 민주주의는 강령상 문언에서 드러나는 의미와 피청구인 주도세력이 진정으로 추구하고 의도하고 있는 내용과는 사뭇 다르다"(판결문 89~90쪽)는 대목에서 정확히 드러난다. '숨은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8인 재판관의 정당 해산 인용 판결문에는 '숨은 목적'이라는 표현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만약 정당의 진정한 목적이 숨겨진 상태라면 공식 강령은 이른바 허울이나 장식에 불과할 것이고, 이 경우에는 강령 이외의 자료를 통해 진정한 목적을 파악해야 한다"(13쪽)고 하여 '진정한 목적이 숨겨진 상태'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아마도 '은폐된 목적'이 있다는 법무부의 심판청구서를 그대로 베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적 작문일 것이다.
헌법재판관 8인은 21세기 궁예?그런데 헌재 8인의 재판관은 '진정한 목적이 숨겨진 상태'를 파악하지 못했다. 이들은 수십 페이지에 걸쳐 진보적 민주주의가 민주노동당과 진보당에 도입된 과정을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지만, 진보적 민주주의의 '숨겨진 목적'을 찾아내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피청구인 주도세력은 모든 국민에게 주권이 있다는 국민주권원리와는 달리, 한 사회의 구성원을 특권적 지배계급과 계급적 개념인 민중으로 구분한 다음, 각기의 주권은 적대적으로 대립한다고 보고, 진보적 민주주의는 낡은 기득권 세력인 특권적 지배계급과는 공존할 수 없으므로 그들이 장악한 권력을 빼앗아 민중에게 돌려준다는 것이다. 즉, 주권자의 범위를 민중에 한정하고 민중에 대비되는 일부 특정 집단에 대해 적대적인 관계로 설정하고 있으므로, 피청구인 주도세력이 내세우는 민중주권주의는 일반적 의미로서의 국민을 주권자로 보는 국민주권주의와 다르다고 할 것이다.(70쪽)위 인용문에는 난데없이 '피청구인 주도세력'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주도세력이란 "진보적 민주주의의 실현을 추구하는 경기동부연합과 광주전남연합, 부산울산연합의 주요 구성원 및 이들과 이념적 지향점을 같이하는 당원들"이라고 규정되어 있다. 이들은 "당직자 결정 등 주요사안을 결정하면서 당을 주도"한 세력들이다.(42쪽)
헌재 판결문 논리에서 '주도세력'은 진보당의 목적과 활동의 위헌성을 연결하는 핵심고리이다. 헌재 재판관 8인은 '주도세력' 개념을 갖고 논리 비약에 나선다. 첫째, '주도세력'이 진보적 민주주의를 당에 도입했다는 것이다. 둘째, 이들 '주도세력'의 "형성과정, 대북자세 및 활동상황, 활동경력, 이념적 지향점 등"을 살펴본 결과 진보적 민주주의에 대해 위와 같은 결론을 내린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은 4단논법이다.
- 진보당은 주도세력들이 좌지우지한다.- 주도세력은 대한민국 체제를 전복시키라는 북한의 지령에 의해 움직인다.- 그같은 지령을 드러내기 어려운 관계로 주도세력은 진보적 민주주의를 내세웠다.- 따라서 진보적 민주주의는 북한의 사회주의 혁명 이념을 의미하며, 진보당은 북한식 사회주의 폭력혁명을 꿈꾼다.한 마디로 말해 '(북한식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는) 주도세력'이 곧 통합진보당이라는 것이다. 이런 논법에 기초해 헌재 8인은 10만에 달하는 진보당 당원들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버렸다. 14년의 '민주노동당-통합진보당'의 역사에서 수십 차례 넘게 개최되었던 당대회-중앙위원회 등의 회의는 그야말로 요식행위가 되어 버렸다.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을 지지한 유권자들은 '주도세력의 북한 사회주의 혁명 노선'에 동조한 꼴이 되었다.
헌재가 증거주의를 버리고 관심법을 택한 결과다. 재판관 8인은 법무부의 주장을, 법무부측 증인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했고, 진보당 측 변호사의 변론과 증언은 모조리 배척했다. '증거는 없으나 내가 관심법으로 보니 너희들은 위헌정당이다'라는 것이다.
과거 후삼국시대 미륵을 자처했던 궁예가 사용하던 바로 그 관심법이다. 다음은 한 방송사의 드라마였던 <태조 왕건>에 나오는, 궁예의 대사 중 일부이다. 궁예는 자신의 말을 제대로 집행하지 않는 신하들을 모아놓고 관심법을 쓰기 위해 눈을 감았다. 모두를 긴장하고 숨죽이고 있는데, 어느 구석에서 마른 기침 소리가 나왔다. 궁예가 눈을 뜨며 말한다.
궁예 : 누구인가? 지금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어? 관료1 : 신... 신이옵니다, 폐하. (다시 마른 기침) 궁예 : (한참 뚫어져라 보다가) 참으로 딱하구나. 지금 짐이 관심법을 하고 있는데, 어찌 기침을 할 수가 있느냐, 이 미련한 것아? 관료1 : 소...송구하옵니다, 폐하. 용서하시어 주시오소서. 궁예 : 내가 가만히 보니, 네 놈 머리 속에는 마군이가 가득 차 있구나. 그리고 궁예는 군사들에게 명령한다.
궁예 : 저 자의 머리속에는 마군이가 가득하다. 그 마군이를 때려 죽여라.궁예의 발언은 재판관 8인의 판결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기침을 내뱉은 '관료'는 '진보당'이며, 그 관료의 머릿속에 가득 차 있다는 '마군'은 '주도세력'이다. 궁예가 눈을 감고 관심법으로 관료의 마군을 발견했던 것처럼, 헌재 재판관 8인 역시 눈을 감고 진보당의 '주도세력' 혹은 '진보적 민주주의'를 보았다. 궁예가 기침 소리를 갖고 마군의 존재로 '확신'했던 것처럼, 재판관 8인의 관심법은 진보적 민주주의를 갖고 '주도세력의 당권 장악'으로 '확신'했다.
궁예가 마군의 실체를 밝히지 않고 관료를 처형했던 것처럼, 재판관 8인은 주도세력의 실체를 밝히지 않고, 주도세력과 진보적 민주주의 그리고 진보당과의 관계를 규명하지 않은 채 진보당을 해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