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2014년 12월 19일 이런 평결도 있었다

서울시민인권배심회의, '이주아동 보육료 차별 시정 권고' 평결

등록 2015.01.08 11:32수정 2015.01.08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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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만이 아니라, 세상 돌아가는 소식에 작으나마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작년 12월 19일을 '8:1'이라는 숫자로 기억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날을 '8:4'로 기억한다. 그날 밤 늦게 결정된 서울시민인권배심회의 결과를 두고 하는 말이다.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 해산을 선언한 그 날, 오후 7시부터 10시께까지 서울시청 신청사 3층에서는 제1차 서울인권배심회의가 열렸다. 서울시민인권배심원제는 서울시 인권센터에 접수된 인권침해 사건 중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커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사건들을 대상으로 한다. 여기에는 다양한 시민이 배심원으로 참여해 공개적으로 논의하고 시민인권보호관에게 의견을 제시한다.

이를 위해 서울시는 지난 8월 27일부터 9월 15일까지 공개모집을 진행했고 응모한 910명의 시민 중 추첨을 통해 자치구별 6명씩 총 150명의 시민인권배심원을 선발했다. 또 인권단체와 서울시·자치구 관련 부서의 추천을 받아 전문가 배심원 50명을 선정했다. 배심원단 구성 이후 설명회와 모의회의가 진행됐다. 첫 회의가 12월 19일에 있었고, 배심원단은 첫 평결을 냈다. 이렇게 나온 배심원단의 평결을 서울시장이 '권고수용'하면 최종 확정된다.

이때 논의된 사건의 신청인으로서 평결 현장에 있었던 내가 그 결과가 세상에 알려지길 기다린 지 벌써 20일이 지났다. 회의 당일 평결이 났기 때문에 며칠만 기다리면 서울시가 그 결과를 세상에 내놓을 줄 알았다. 그런데 20일 넘도록 서울시는 보도자료 하나 내지 않았었다. 그걸 보며 드는 생각은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는 격'이란 속담이었다. 성소수자 차별금지 조항 문제로 서울시인권헌장 선포가 무산되면서 서울시가 지나치게 소심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서울시 인권센터가 평결 결과를 오늘(1월 8일)자로 발표한 것이다. 늦었지만 환영한다. 그날 배심회의를 청구한 신청인인 내 입장에선 박원순 서울시장이 논란이 무서워 '권고 수용 여부'를 저울질하거나 하지 않았으면 한다. 오히려 서울시가 '그날, 서울시민은 위대했다'라고 나팔이라도 불었으면 한다.

어린이집에서 차별 받고 있었던 이주노동자의 자녀


나는 2011년 지인 소개로 만난 한 후원자를 통해 이주아동·청소년 장학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2012년 몽골 출신 이주노동자 학부모가 어린이집에서 자신의 아이가 차별받는다는 사실을 알려왔다. 아이 엄마는 다른 아이들이 다 받는 보육료 지원을 자신의 아이만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며, 아이가 그 때문에 상처 받지 않을지 걱정이라고 했다.

한국에서 태어난 아이는 또래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한국어를 잘했고, 구김살 없이 자라 환하게 웃을 때면 볼이라도 꼬집고 싶을 만큼 귀여웠다. 그 당시 아이 문제로 어린이집 보육료 지원절차를 알아본 결과, 보육료 지원은 출생등록과 국적 문제가 걸려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아이가 법적으로 지원받을 수 있는 근거는 없어 보였다.


그러던 중 2012년 하반기에 서울시가 '서울특별시 인권기본조례'를 제정한다는 소식을 접하곤 어쩌면 이주아동 보육료 지원 차별 문제가 풀릴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가졌다. 서울시 인권기본조례 제2조 2항에 의하면 "'시민'이라 함은 시에 주소 또는 거소를 둔 사람, 체류하고 있는 사람, 시에 소재하는 사업장에서 근로하는 사람을 말한다"고 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당 조례에서 서울시는 국적에 따라 시민을 구별하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체류자격에 따른 구별도 하지 않고 있었다. 결국 외국인 아동이라고 해서 무상보육을 배제하는 것은 서울시 조례에 어긋난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만큼, 이 행위가 차별행위인지 아닌지 따져 볼 필요가 있었다.

마침 서울시에서 인권기본조례에 따라 서울시 인권센터가 설립됐고, 시민인권보호관 활동이 막 시작될 때였다. 2012년 말 차별행위에 대한 진정서를 썼다. 그 과정에 해당 사례를 좀 더 구체화시키기 위해 진정서 제목을 '미등록 이주노동자 자녀에 대한 보육지원 차별'이라고 썼다.

'미등록' 이주아동이라고 분명하게 지적하지 않으면, 보육지원 차별을 시정하더라도, 체류자격을 가진 외국인 아동에 한해 시정할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부분이 시민인권보호관들을 난감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실제 진정서가 접수되고, 첫 조사가 시작되기까지 몇 달이 걸렸다. 그렇게 조사는 2013년 초에 시작됐지만, 해를 넘기고도 아무런 연락을 받을 수 없었다.

진정서를 낸 지 만 2년, 드디어 소식이 왔다

서울시민인권배심회의 2014년 12월 19일 서울시 신청사 3층에서 열렀던 제1차 서울시민인권배심회의 모습
서울시민인권배심회의2014년 12월 19일 서울시 신청사 3층에서 열렀던 제1차 서울시민인권배심회의 모습고기복
진정서를 쓰고 서울시 인권센터에 관련 사실을 전달한 지 만 2년이 다 돼 갈 즈음에 내가 낸 진정 사건을 '시민인권배심회의'에 회부할 의향이 있느냐는 연락을 받았다. 지난해 11월 28일 서울시민 인권헌장 선언이 무산된 직후였다.

만 2년을 끈 진정사건을 시민인권배심회의를 통해 매듭짓겠다는 것이었다. 만일 배심회의에서 2/3 이상의 찬성으로 합의 평결이 나지 않으면, 미등록 이주노동자 자녀에 대한 차별 시정은 더 어려워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배심회의 일정이 잡힌 이후 상황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서울시민 인권헌장 선언 무산 여파가 컸다. 인권헌장 선언에 대한 조직적인 반대 움직임은 거셌고, 선언을 촉구하는 측도 농성으로 박원순 시장을 압박하고 나섰다.

12월 10일 인권헌장 선언 무산에 따른 박 시장의 사과 표명을 보면서 이주노동자 관련 단체에 몸을 담고 있는 많은사람들이 "지금은 때가 아니다, 회의 시기를 뒤로 미루자"는 연락을 해왔다. 알 만한 이주노동자 관련 활동해왔던 변호사, 단체 대표 관계자 등 전문 위원들은 너나없이 회의 참석을 거절했다.

회의 전날인 18일, 새누리당 이자스민 의원이 '이주아동권리보장기본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어떤 이는 "어차피 법안 통과되는 거 보고 결정내리면 될 텐데, 굳이... 어려움 싸움할 필요 있느냐"는 식으로 이야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보건복지부 관계자가 이자스민 의원 법안 발의에 대해 "국내법과 같은 효력이 있는 유엔아동권리협약은 이주아동에 대한 차별을 금지한다. 더는 이를 무시할 수 없는 상황으로 합리적인 토론을 할 때가 됐다"고 말한 것처럼, 시기를 저울질하는 것은 문제를 푸는 방법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것은 의지의 문제라고 보았다. 비록 지금 실패하더라도, 논의 자체가 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는 판단을 하고 배심회의를 예정대로 진행하겠다는 뜻을 서울시 인권센터에 분명히 전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 자녀에 대한 보육 미지원은 차별"

그 결과는 놀라웠다. 8:4로 '미등록 이주노동자 자녀에 대한 보육 미지원은 차별이다'라는 합의 평결이 나온 것이었다. 세 시간 가까운 열띤 토론 끝에 서울시 인권배심원단이 내린 첫 판결은 역사의 한 획을 긋는 것이었다. 첫 번째 회의라는 면에서 그 의미가 있었고, 그 내용에 있어서 국제사회가 요구하는 인권규범을 지킬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다수의견으로 합의 평결된 내용은 시민인권보호관에게 전달되었고, 서울시장에게 다음과 같이 차별 시정을 주문했다.

"서울특별시장은 '대한민국 헌법'과 '영유아보육법' 등 각종 법령 및 '유엔아동권리협약' 등 국제법, '서울시 어린이·청소년 인권조례' 등 서울시의 각종 조례에 따라 ... 미등록 이주아동에게도 영유아 및 가정의 복지증진에 이바지하려는 목적으로 지급되는 보육료와 양육수당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해야 합니다."

박 시장은 2012년 6월 9일 다문화가정의 고충을 듣고 해결방법을 고민하는 서울타운미팅에 참석한 후 '원순씨의 시정일기 22'에 소감을 이렇게 밝힌 바 있다.

"이들도 꿈을 가지고 한국에 온 사람들입니다. 서울에서 극빈층으로 전락하고, 2세 교육에까지 실패하면 이들은 어떤 희망으로 이 땅에 살 수 있겠습니까? 서울에 사는 외국인은 거의 40만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서울은 이미 국제도시입니다. … 이들에게 좀 더 희망과 꿈을 실천할 수 있는 서울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박 시장도 이야기한 것처럼 미등록 이주아동에 대한 보육 지원 및 교육 기회 부여는 사회통합의 측면뿐만 아니라 이주민들이 사회적으로 주변화되는 것을 방지하고, 어렸을 때부터 다른 아이들과 함께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참여하는 사회화 과정을 경험하게 할 것이다. 그들은 취약계층으로 머물러 있는 부모와는 다른 자신의 미래를 계획할 수 있는 가능성을 키울 수 있다.

오늘날 미등록 이주아동에 대한 기본권적 지원을 이야기하면 어떤 이들은 이주민으로 인한 내국인의 일자리 잠식 위협을 들먹이며 차별을 정당화하려 한다. 그러나 나치의 인종주의가 유대인 때문에 일자리를 잃는다는 막연한 공포와 정치인의 선동이 일으킨 결과였다는 것을 떠올리면 나와 다른 이들에 대한 차별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생각해 볼 일이다.

이런 면에서 작년 12월 19일 시민인권배심회의 평결 결과는 역사적이며, 세계시민 선언인 셈이다. 미등록 이주민 아동에 대한 보육료 미지급이 사회복지서비스와 관련하여 대한민국 헌법, 유엔아동권리협약, 국가인권위원회법, 영유아보육법, 서울특별시 인권기본조례, 서울특별시 어린이·청소년 인권조례 등에서 금지한 합리적 이유 없이 '국적'을 이유로 한 차별행위임을 시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서울시는 지난 서울시민인권배심회의 평결과 시민인권보호관의 주문을 받아들여서 우리사회에 이주아동과 그 가족의 권리에 대한 많은 논의를 이끌어내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서울시 #미등록이주아동 #박원순 #서울시인권헌장 #서울시민인권배심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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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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